송지 군곡리·옥천 흑천에서 출토
고대 국제 해상루트서 주로 발견
제2 진시황을 꿈꿨던 중국 신나라 왕망, 그는 강력한 왕권과 나라를 만들겠다며 토지개혁과 화폐개혁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그러나 그가 세운 신나라는 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짧은 기간인 15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만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 최초 통일 국가를 건설한 진시황, 진시황에 이어 두 번째로 중국을 통일한 이가 유방이다. 건달이었던 유방은 당대 최고 엘리트이자 장사였던 초나라 항우를 제치고 중국 역사에 화려하게 등장해 한나라(기원전 202~기원후 8)를 건국했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불멸이 없듯 그가 세운 한 왕조도 200여년 정도 지탱하다 왕망에 의해 막을 내렸다. 왕망은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의 왕위를 찬탈하고 신나라(기원후 8~24)를 건국하며 중국의 역대 왕조에 이름을 올린다.
그러나 왕망의 신나라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에서나 잠깐 접할까, 기억되지 않는 왕이자 나라이다.
그런데 왕망과 신나라 이름은 마한 및 가야 권역에 포함된 서남해안 지역에선 꽤나 오르내리는 이름이다. 이유는 신나라 멸망을 재촉한 화폐 화천(貨泉) 때문이다.
화천, 서남해안 주로 출토
제2 진시황을 꿈꾼 왕망은 한나라 왕위를 찬탈한 후 토지개혁을 비롯해 노비매매 제한, 총 5회에 걸친 화폐개혁 등을 단행했다.
그런데 15년 동안 무려 5번이나 시도한 화폐개혁의 결과는 화폐의 가치를 오히려 떨어뜨리고 물가가 오르는 등 경제를 혼란에 빠트렸다.
그중 그가 네 번째로 단행한 화폐개혁으로 탄생한 것이 화천(貨泉)이며 이는 신나라의 멸망을 앞당겼다.
왕망은 세 번이나 단행한 화폐개혁이 실패하자 ‘재화가 샘솟는다’는 의미인 화천(貨泉)을 발행했다. 유통이 그만큼 잘되 경제가 성장한다는 큰 뜻을 품고 발행한 화폐가 화천인 것이다. 이때 함께 발행한 것이 화포(貨布)이다. 그러나 두 화폐간의 충돌 때문에 경제는 더욱 혼란에 빠졌고 신나라 붕괴마저 앞당겼다.
그런데 왕망이 만든 화천(貨泉)이 마한권역인 서해안과 가야권역인 남해안 지역, 제주도와 일본 규슈지역에서 출토되면서 고대 해상루트의 지표로 떠오르게 됐다.
특히 화천은 기원후 14∼40년 사이에 주조됐기에 고고학적 연대를 정하는 중요 지표유물 위치까지 점유하게 됐다. 실패한 화폐개혁의 상징인 화천(貨泉)이 고고학 연구에선 효자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화천은 1928년 제주 산지항 축조공사 도중 11점이 확인된 후 김해 회현리, 제주 금성리·종달리, 나주 랑동 등에서 1~2점씩 나왔다가 2016년 광주 복룡동 유적 토광묘에서 49점이 꾸러미째 출토됐다.
또 송지면 군곡리 유적지에서 초기 발굴 때 1점에 이어 올해 1점이 추가로 출토됐고 지난해 옥천면 흑천리 마등 4호 토광묘에서 13점이 꾸러미째 확인됐다. 모두 중국 및 일본으로 연결되는 해상교통상의 중요한 요지에서 화천이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또 ‘화천’의 주조와 사용기간은 기원후 14~40년으로 이 시기 해상교역이 활발히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화천, 낙랑군 통해 유입
화천이 유통됐던 시기 해남은 마한 54개 소국 중 신미국(침미다례)이 백포만을 통해 대외 해상교역을 활발히 펼쳤을 때이다.
가야에선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 경남 고성과 사천 일대 소가야, 일본은 야요이 시대로 상호간 해상교역이 활발히 이뤄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신나라에서 발행된 화천이 송지면 군곡리와 옥천면 흑천 등 서남해안으로 어떻게 유입됐을까.
중국 한나라 제7대 황제인 무제(재위 기원전 141년~87년)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 땅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 등 4군을 설치했다.
이중 진번과 임둔군은 토착민들의 저항에 BC 82년에 폐했다. 또 한사군 중 가장 강력했던 낙랑군도 이후 잦은 내분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를 바로 잡으려 했던 이가 한나라 왕조를 찬탈한 왕망이었다.
물론 왕망의 신나라는 후한의 광무제에 의해 멸망하지만 이후까지 존속한 낙랑군은 마한과 중국과의 대외교류 창구역할을 하게 된다. 낙랑을 통해 중국의 철기문화가 마한소국들로 유입되고 이때 함께 유입된 것이 중국 신나라의 화천이었다.
화천, 지배자 위세용품
그동안 화천은 주로 조개더미 등 생활유적에서 소량 확인됐다.
제주 산지항 11점, 제주 종달리 조개더미 1점, 제주 금성리 조개더미 2점,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 1점, 해남 송지면 군곡리 생활유적지 2점, 나주 복암리 랑동 저습지 2점, 신안 해저침몰선 1점 등이다.
그런데 2016년 광주 복룡동 유적 토광묘에서 처음으로 꾸러미(50여 점)가 출토된 이후 지난해 옥천면 흑천 토광묘에서 13점이 출토됐다.
이러한 출토현황으로 보아 화천이 화폐로서 거래된 것이 아니라 당시 해상세력의 노잣돈이자 항해의 안전을 위한 의례용, 동검 및 동경과 같은 위신재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위신재는 소유자의 권위와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즉 우월한 힘과 부를 지닌 사람들이 특별한 물건을 통해 다른 이들과 다름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 위신재이다.
당시 신미국 해상세력들은 이러한 용도의 화천을 구입하기 위해 다른 무역품과 물물교환 했을 것이다.
해남에 존재했던 신미국은 현산면 백포만항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따라서 백포만항을 끼고 있는 송지면 군곡리에 해상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그런데 옥천면에서 화천 꾸러미가 발견됐다는 것은 초기 철기시대 중국과 직접 교역을 담당했던 국제해상세력이 이곳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음을 보여준다. 지금은 간척사업 등으로 해남에서 유일하게 바다를 끼지 않는 곳이 옥천면이지만 예전에는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다.
당시 해상교역로에 위치했던 옥천면은 신미국 멸망 후에도 국제해상세력들의 거점지였다. 만의총이라 불리는 만의총 고분 등 여러 기에 이른 고분이 분포돼 있어 신미국 멸망 이후에도 거대 해상세력이 이곳에서 활동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흑천리 마등 4호 토광묘에서 출토된 화천은 3점씩 두 꾸러미와 7점 한 꾸러미로 발굴됐다.
동전 1개 외에 부식으로 인해 화천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의 최첨단 장비 ‘나노-컴퓨터단층촬영(Nano-CT)’을 활용해 화천임이 확인됐다.
박영자 기자/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