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암일기》는 윤이후가 1692년 1월부터 1699년 9월까지 8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 일기다. 일기가 쓰여진 17세기 말의 조선은 도탄에 빠져있었다. 모이를 줄 수 없어 닭이 알을 안 낳았다면 무슨 말을(1696.9.30.) 더 할 것인가? 이런 때에 윤이후는 무슨 일을 했을까? 함께《지암일기》를 읽어보자.
1693년 6월4일. 마을에 사는 연로한 자, 늙어 혼자 사는 자, 단지 수발을 드는 자녀에 의지하여 연명하는 자, 겨우 환란을 넘긴 자가 노비 여부를 막론하고 모두 16명인데, 무휼하는 뜻으로 각기 벼 2말씩 지급했다.
1696년 2월30일. 지난번에 마을 노비들에게 남녀를 가리지 않고 벼 1말씩을 줬다. 지난 28일에도 그렇게 했다. 이번에는 노비가 아닌 사람까지 나눠줬다.
1696년 4월28일. 상경하는 길에 굶어 죽은 시체를 봤다. 영암과 해남은 모두 조금 낫다고들 한다. 팔마마을은 얼굴색이 누렇게 뜨거나 흩어져 다른 곳으로 간 사람조차 없다. 이는 농사가 특별히 잘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비축해둔 곡물로 여러 번 사사로이 진휼했기 때문이다. 이런 선행을 보고도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전직 고관(지평)을 지낸 부자로서 마땅히 할 도리를 한 것이 아니냐고.
그러나《지암일기》는 윤이후도 식량이 떨어질 때가 많았다고 증언한다. 그는 그럴 때 어떻게 했을까? 관에서 환곡을 가져오고(1694.5.17.) 익지 않은 벼를 타작하고(1698.7.12.) 논과(1696.4.4.) 암소를 팔고(1698.6.29.) 벼섬을 받고 노비를 풀어주는(1696.2.28.) 등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한다.
윤이후는 유배객들이 먹을 식량을 조달하고, 날마다 대문을 두드리는 배고픈 이웃의 메마른 손에 꼭 쥐어준다.
말이 부자이지 발 뻗고 잠드는 날이 없다. 그래서 필자는《지암일기》를 보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떠올리는 것이다. 330년 전에 쓴《지암일기》는 2020년에 한글로 번역됐다. 출판사의 설명처럼 “이만큼 내용이 다양하고 재미있는 일기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번역자들은 정말 친절하게도, 일기를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다.
네이버에서《지암일기 위키》를 검색한 후 (1)TEXT-지암일기 (2)위키 페이지 가기 (3)일기의 해당 연도 (4)해당 날짜의 일기. 순서대로 클릭하면 한글과 한문 원문 모두 만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