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렬로 사살, 그런데 살아남은 자 있었다
14년 만에 2차 발굴
8월13일 어란항서 개토제
기적같이 살아남은 자
1950년 7월16일 해남 전역에서 사람들이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왜 갔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사라진지 17일째, 기적적으로 돌아온 이들이 있었다. 한 명은 진도 구자도 낚시꾼에 의해 구조됐지만 충격으로 실어증을 앓다 1주일만에 사망했다.
그는 갈매기섬에서 구조됐다고 해서 갈매기바라 불렀다. 산이면 금호리 박상배와 업자리 박태환, 현산면 안평리 김영모, 북평면 용운리 고광열의 형도 살아서 돌아왔다. 이들로 인해 진도 갈매기섬의 참상이 알려졌고 사건발생 17일 후 유족들의 발길이 갈매기섬으로 향했다.
갈매기섬에는 밧줄로 엮인 부패한 시신들이 일렬로, 그것도 포개져 있는 상태에서 유족들을 맞았다. 도민증과 신발 등을 통해 시신을 찾은 경우는 운이 좋았고 부패가 심해 대부분 유족들은 시신을 찾지 못했다.
같은 시기 송지면 사람들도 갈매기섬으로 향했다. 이들 중 시신을 확인한 이들은 혼란한 시국 때문에 곧바로 시신을 가져오지 못하고 섬에 가매장한 후 한국전쟁이 끝난 3년 후에 선산으로 이장했다.
이때 갈매기섬으로 끌려와 살아남은 송지면 내장리 사람이 있었다. 해초와 굴로 목숨을 연명한 그는 송지면 사람들에 의해 구조돼 집으로 돌아왔다.
불에 타 버린 시신들
사건발생 두 달 뒤인 1950년 9월13일, 갈매기섬의 시신을 수습하러 가던 희생자 가족 5명이 해남군 해상에서 경찰에 의해 모두 사살됐다.
이때는 부산으로 피신한 경찰들이 해남으로 돌아왔기에 유족 누구도 감히 갈매기섬을 찾지 못했다.
또 경찰은 시신 위에 석유를 뿌리고 불까지 질러 사건을 은폐했다.
산이면 상공리 동복오씨 여덟 가정은 1964년에야 갈매기섬에 갈 수 있었다. 갈매기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산이 금호도 박상배와 함께였다.
박상배는 산이면 상공리 사람들이 일렬로 묶인채 사살된 장소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가 가리킨 곳에 7구의 인골이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그 뼈들이 누구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수습된 뼈를 각기 나눠 자신들의 선산에 안장했다. 한 구는 조금 떨어진 나무 밑에서 발견됐다. 도망치다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은 같은 동네 사람이었다. 학살장소에 있었던 박상배는 그것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꽁꽁 숨어버린 갈매기섬
이곳에서 시신을 찾아온 유족들은 오랜 기간 입을 다물었다. 극단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갈매기섬의 참상을 꽁꽁 숨긴 것이다.
진도 갈매기섬 참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1년, 진도출신 박문규씨에 의해서다.
그는 국무총리 산하 제주 4‧3항쟁 진상위원회로부터 진도 무인도 중 4‧3사건과 관련된 곳이 있다는 조사의뢰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진도 갈매기섬이 6‧25때 부산으로 후퇴하던 해남경찰에 의해 해남보도연맹원이 집단 학살된 곳이란 증언을 듣게 됐고 진도 갈매기섬 참상은 여러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2007년 정부산하 제1기 과거사위원회는 이 사건을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다’는 진실규명을 내렸고 2009년 충북대학교 유해발굴센터의 갈매기섬 유해발굴이 진행됐다.
유해발굴에선 불에 탄 흔적이 있는 뼈들이 상당수 수습됐는데 이중 왼쪽 허벅지 뼈를 기준으로 가늠할 수 있는 개체 수는 19구였다.
또 카빈, M1 탄피, 45구경 탄피와 탄두 등이 출토됐고. 수습된 유골은 세종시 추모의집에 임시 보관돼 있다.
14년 만에 제2차 발굴
당시 유해발굴은 허가면적 300평 중 120여평만 발굴이 진행됐다. 이에 유족들은 나머지 180여평에 대한 추가발굴을 요구했고 이에 해남군은 국비 1억5,000만원을 지원받아 8월13일부터 제2차 발굴에 들어간다.
2차 발굴은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이 맡아 진행한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은 2차 발굴에 앞서 오는 8월13일 오후 2시 송지 어란항에서 개토제를 지낸다.
진도 갈매기섬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남경찰이 상부의 지시에 의해 보도연맹원을 몇 차례에 걸쳐 진도 갈매기섬으로 끌고 가 집단학살한 사건이다.
희생자는 1946년 11월11일 미군정의 곡물공출 반대와 친일파 척결을 주장한 ‘해남추수봉기’ 가담자와 여순사건 관련자 등이었다. 해남경찰이 강제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킨 민간인은 600여명에 이르렀다.
한날 동시에 사라진 사람들
그리고 6‧25가 발발하자 해남 북‧서부지역(해남읍, 계곡면, 마산면, 산이면, 화원면, 화산면, 삼산면) 보도연맹원들은 관할지서 소속 경찰관에게 연행돼 해남경찰서(해남 식량영단창고)에 구금됐다가 1950년 7월16일 화산면 해창항에서 승선해 진도 갈매기섬으로 끌려갔다.
해남 남부지방(현산면, 북평면, 북일면, 송지면) 보도연맹원들은 송지지서와 창고에 구금됐다 같은 날인 7월16일 송지면 어란항에서 승선해 갈매기섬에서 총살됐다.
진도 갈매기섬 제2차 유해발굴은 오는 11월16일까지 진행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