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디자인 칼럼리스트
김신/디자인 칼럼리스트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대량생산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디자인은 산업혁명 이후에 탄생한 개념이다. 디자이너는 최종 생산될 물건을 고안하지만, 생산되는 현장, 즉 공장에는 없다. 
디자인은 고안과 생산의 분리가 원칙이다. 이에 따라 산업혁명 이전에 생산된 물건을 지칭하는 공예와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공예품은 공예가가 머릿속으로 고안한 것을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든다. 따라서 공예품은 하나하나가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반면에 기계로 대량생산되는, 디자인된 산업제품은 한결같이 똑같다. 소비로 자기를 특별하게 표현하려는 욕망이 큰 현대인들은 이 점이 불만이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내가 사용하는 대량생산품이 정말 나의 고유한 물건이 되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 되는 방법이 있다. 나는 그것을 ‘시간의 축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가 그런 나의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해준다. 
주인공 독신 남자는 일본의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청소부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화초에 물을 주고 세수를 하고 청소부 옷을 입고 집을 나선다. 차를 타면 옛날 카세트테이프를 틀어 음악을 듣고 일터에 도착하면 꼼꼼하게 화장실을 청소한다. 여러 공중화장실을 다니다 보면 매번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공원에서는 늘 똑같이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는 여성을 만나고 노숙자 할아버지를 만난다. 
그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 루틴을 성실하게 이어간다. 마치 영화는 사람들의 삶이란 똑같은 하루의 일상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반대다. 똑같은 것 같지만 모든 하루는 조금씩 다르다고 주장한다. 삶은 쳇바퀴 돌 듯 똑같은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날이 단 하루도 없다. 이 순간은 유일하고 유일한 나날의 연속으로 삶과 내 주변은 조금씩 변한다. 
영화에서는 가출한 조카가 자기 집으로 불쑥 찾아온 대목이 있다. 이때 청소부는 몰라보게 많이 커버린 조카를 보고 놀란다. 아마도 매일 조카를 봤다면 조카는 크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우리들의 경험도 똑같다. 내 자식은 잘 안 크고, 남의 자식은 빨리 크는 것 같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시간은 아주 느린 것 같지만 이 세상 무엇보다 성실하게 지나간다. 

 그렇다면 대량생산된 천편일률적인 산업 제품과 그 영화가 무슨 상관인가? 시간의 힘이 천편일률적인 대량생산품을 유일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구매한 순간 그 제품은 다른 환경에 놓일 것이다. 나는 다르게 그것을 사용할 것이다. 더 자주 또는 가끔, 더 거칠게 또는 더 소중하게 사용할 것이다. 
물건은 사용감이라는 인공적 풍화를 겪을 것이고, 그것이 놓인 위치와 공기에 따라 자연의 풍화를 겪을 것이다. 이제는 똑같은 물건이 새것과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단 하나의 물건이 된다. 나는 사람들이 왜 빈티지 물건을 사는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그 물건들의 형태와 표면에 덮인 인공적이고 자연적인 풍화, 그 시간성을 가치 있게 본 게 아닐까. 

 시간은 그렇게 보잘것없는 대량생산품을 아우라가 있는 단 하나의 물건으로 구원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오래 써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오래 사용한 물건은 그것이 싸구려라도 가치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쓸모를 증명한 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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