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면 월신 출신 43세로 비행 중 순직
평전 「하늘에 새긴 영원한 사랑, 조국」

사고 이틀 전, 부대 안 교회에서 찍은 마지막 가족 사진.
사고 이틀 전, 부대 안 교회에서 찍은 마지막 가족 사진.

 

 “내가 죽으면 가족은 내 죽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담담하고 절제된 행동을 했으면 좋겠다. 또 장례 후 부대장과 소속 대대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돈 문제와 조종사의 죽음을 결부시킴으로써 대의를 그르치는 일은 일절 없어야 한다. 나 때문에 조국의 재산이 낭비되고 공군의 사기가 실추되었음을 깊이 사과해야 한다. 비록 세상이 변하고 타락한다 해도 군인은 조국을 위해 언제 어디서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 전투기 조종사의 운명이다.” <1992년 12월 순직 동료 장례식장을 다녀와서 쓴 故오충현 대령 일기>

 

            故오충현 대령
            故오충현 대령

 

그리고 18년 후인 3월 “그날 아침도 평소와 같았다. 새벽에 일어난 남편은 아내가 차려 준 아침을 먹었다. 홍삼 진액도 빼놓지 않았다. 6시가 조금 지나 남편이 집을 나섰다. 아내는 언제나처럼 현관문 앞에서 남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뽀뽀했다. “잘 다녀와요.” 계단을 내려가던 남편이 잠시 멈춰 아내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남편 故 오충현(43ㆍ공사 38기) 대령은 그날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출처:중앙일보 2010년 6월6일자]

냉정하리만큼 아들과 이별

2010년 3월6일 제18전투비행단에서 거행된 영결식에서 유족들은 냉정하리만큼 차분하게 아들과 이별했다. 누구보다도 비통했을 어머니도 떨리는 손으로 유골함을 만져보는 것으로 이별을 대신했다. 
장례식 후 해남 집으로 내려간 아버지는 아들이 18년 전 유언처럼 남긴 일기장 내용대로 전라도 특산물인 홍어를 사 105전투비행대대에 보냈다. “내가 조종사 여러분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요. 이것을 먹고 힘내시기 바랍니다”라는 간단한 메모와 함께. 부인 박소영씨도 제18전투비행단에 준비한 성금을 전달하며 장례식이 무사히 치러질 수 있도록 도와준 데 감사 인사를 전달했다. 그것은 남편의 뜻이기도 했다.

좌절된 육사의 꿈

1985년 12월 초, 공사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계곡면 월신마을로 날아왔다. 합격통지서였다. 이날 아버지는 아들의 공사 합격통지서를 받아들고 하염없이 울었다.
1년 전, 아들은 육사에 합격했다. 그런데 진학하지 못했다. 
그의 집은 마을회관으로부터 떨어진 끝자락에 위치했다. 집배원은 평소 아버지가 마을회관에 자주 놀러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우편물을 마을회관에 놓고 가곤 했다. 그의 육사합격 통지서는 그렇게 마을회관에 방치됐고 그의 육사진학은 이뤄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후기로 전남대에 지원했고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그러나 집안사정이 어려워 그는 숙식 모든 것을 지원해주는 사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재수를 결심했다. 집에서 하는 나 홀로 재수였다. 
당시 할머니와 어머니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낮에는 남의 논밭에서 일을 하며 약값을 벌어야 했고 병간호도 그의 몫이었다. 공부는 오직 저녁시간뿐이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힘들 때마다 아버지가 방 한 구석에 쌓아 놓았던「논어」,「맹자」등을 비롯해 역사와 철학, 문학 등 동서양의 고전을 읽으며 마음을 일으켰다.
그리고 1년 후 공군사관학교에 합격했다. 합격 후에도 마을 취로사업에 참여해 어머니 약값을 벌었고 또 저녁엔 자신이 떠난 후 가족이 쓸 땔감을 집안에 가득 채웠다.

공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그는 공군사관학교 38기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강릉 제18전투비행단 105대대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2010년 3월2일, 두 대의 전투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날았다. 이날 비행은 신임 전투조종사 최 중위의 공중기동훈련에 맞춰져 있었다. 
이날 비행 스케줄엔 그의 이름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갓 전입해온 부하 최 중위의 솔로 비행이 마음에 걸렸고 이에 최 중위의 비행교관을 자처하며 전투기 뒷자석에 앉았다. 
그러나 이륙 5분 만에 부하장교 2명과 함께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비행시간 2,792시간이나 되는 베테랑 조종사였던 그는 공군 역사에 비행 훈련 중 순직한 첫 번째 비행 대대장으로 기록됐고 순직 후 대령으로 추서됐다. 
다른 동기생들보다 먼저 대령이 됐으나 가슴 아픈 진급이었다.

일기를 토대로 평전 발간

                      故오충현 대령 평전 「하늘에 새긴 영원한 사랑, 조국」
                      故오충현 대령 평전 「하늘에 새긴 영원한 사랑, 조국」

 

 그가 참군인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가 남긴 일기장이었다.
그는 항상 일기를 썼다. 결혼 후에는 아내와 함께 일기를 썼고 그가 남긴 일기 5권을 토대로 공주대 김덕수 교수는 그가 순직한 4년 후「공군 조종사 오충현이 남기고 간 일기-하늘에 새긴 영원한 사랑, 조국」을 발간했다. 
또 그의 순직 2년 후인 2012년 8월3ㄴㄴ일 조선일보 사설은 ‘오충현 대령의 일기를 읽는 이들 가운데 가슴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솟구치고 커다란 위안을 받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톱니바퀴 처럼 정확하고 잣대처럼 반듯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뒤늦게 그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아깝고 슬프지만 그가 우리 곁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고 마음 든든하다’고 적었다.
오 대령의 삶은 2012년 10월 국군의 날 행사 때 대통령 기념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오 대령의 충직했던 군인정신과 순직에 얽힌 안타까움, 영결식에서 보여준 유족들의 의연함은 그의 일기 내용과 함께 전설처럼 공군역사에 남겨졌다.
국방홍보원도 ‘일기장에 남긴 영원한 사랑 고 오충현 대령’의 영상(18분)을 유튜브에 탑재했다. 
네이버⋅다음에서 ‘어느 공군 조종사의 일기장’을 검색하면 많은 블로그나 뉴스에 고 오충현 대령의 관련 글을 만날 수 있다.

하늘을 지킨 진정한 파일럿

故오충현 대령 계곡면 월신마을 생가.
故오충현 대령 계곡면 월신마을 생가.

 

 공주대 김덕수 교수는「공군 조종사 오충현이 남기고 간 일기-하늘에 새긴 영원한 사랑, 조국」에서 “그는 안타까울 정도로 가진 게 없었던 군인이었다. 43세로 짧은 삶을 마감하기까지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힘겨웠던 것이 그의 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전투조종사로 키워준 조국을 사랑했고 그 하늘을 지키는 참군인이 되기 위해 애썼던 파일럿이었다”고 적었다.
평전에는 월신마을이 잘 나와 있다. 고 오충현 대령은 맑은 공기와 따스한 어머니의 품 같은 해남에 언젠가 돌아와서 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계곡면 월신 마을에는 고 오충현 대령의 생가가 남아있다.  

 

김용일/해남군 문화관광해설사
김용일/해남군 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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