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호 시발점 마한
한(韓)은 한민족을 말하며, 한은 곧 마한(馬韓)이자 오늘날 대한민국 국호의 시발점이다. 한에 대한 첫 기록은 250년 무렵 편찬된 중국의「삼국지」위서 동이전이며, 「후한서」,「진서」등에도 등장한다. 한은 기원전 200년 무렵에 건국돼 기원 후 400년 무렵까지 잔존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통설이다.
기원전 194년 고조선의 기준왕은 연나라 망명객 위만에게 쫓겨 뱃길로 남하해 한을 공격해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했다. 당시 한은 사실상 마한을 말하며 경기, 충청, 전라도, 경상도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후에 삼한으로 나뉘어 마한(54국), 진한(12국 신라), 변한(12국 가야)이 됐다. 이중 마한은 가장 강성해 삼한의 맹주였다.「후한서」등에서는 삼한의 모든 소국의 왕은 마한 사람만이 세습한다고 기록했다. 예컨대, 진한(秦韓)은 중국 진(秦)나라 사람들이 고된 부역을 피해 도망해 오자 마한왕이 동쪽 땅을 줘 살게 했다. 또 기원전 20년 진한의 후신인 신라 박혁거세 왕이 호공이라는 사람을 마한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이때 마한왕은 우리의 속국인데 왜 조공을 바치지 않느냐고 대노해 사신 호공을 죽이려했다. 당시 마한왕은 삼한의 맹주였음을 보여준 예이다.
백제 온조왕 때 전기 마한 멸망
백제국(伯濟國) 또한 마한왕이 분할해준 한강유역에서‘십제’란 소국으로 출발했다. 따라서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도 마한왕을 상전으로 섬겼고 사냥한 사슴과 전리품인 전쟁 포로 등을 바치고, 읍치를 옮기려 해도 마한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서기 8년에 이르러 국력을 키운 백제국 온조는 사냥을 핑계로 마한을 몰래 습격해 국읍에 이어 경북 예천군 비룡산에 있는 원산성과 충남 세종시 금성산에 있는 금현성 등을 빼앗고 마한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온조는 서기 18년 앞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은 새로 쌓았다. 고사부리성은 지금 정읍시 고부면의 두승산성 일대를 말한다. 따라서 정읍지역이 온조왕 당시 백제 남방한계선이었다. 다시 말하면 온조왕 당시 경기도, 충청도, 전라북도는 백제에 병합됐지만 전라남도 일대는 아직 마한으로 잔존했다. 온조왕 때를 기준으로, 이전을 ‘전기 마한’ 이후를 ‘후기 마한’이라 칭하기도 한다.
국호 마한 신미국의 등장과 멸망
후기 마한은 여러 중국 사서에서 나온다.「후한서」,「삼국지」,「진서」등에 25년~418년까지 존재한 나라의 기록에 마한이 여전히 등장한다. 특별히「진서」마한조에는 276년~291년까지 25차례나 마한의 소국들이 진(晉)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했다고 기록했다. 또 500년 무렵까지 신라는 글자가 없어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당시 신미국 소국들은 20여 국으로 산에 의지하고 큰 바다 사이에 있으며(依山大海), 국호는 마한신미제국(馬韓新彌諸國)이라 했다. 이 마한신미제국은 전라남도 서남부지역에 있었으며 그 중심국은 해남이었다. 신미국은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당시에 백제와 왜의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한 일본서기에 기록된 침미다례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여기에서 ‘침미’는 ‘신미’와 같고, ‘다례’는 땅의 옛말인‘달’을 왜식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해남이 4세기까지 마한신미제국의 중심지 즉, 도읍지였다는 위상은 고고학으로도 증명된다. 최근 몇 년 동안 발굴조사 한 결과 마한신미국 도읍지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백포만을 중심으로 도처에 마한시기 철기패총유적과 거석 제사터, 초기 대형옹관묘와 고분, 마한주거지와 토성(土城) 등은 600년 고유한 마한문화를 보여준다.
백포만은 신미국 도읍지이자 국제무역항
마한문화는 기원전과 기원후 각 300년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다. 백포만을 중심으로 철기시대 패총유적은 십수 곳에 산포해 있다. 이중 국내 최대의 송지면 군곡패총 유적은 1983년에 발견돼 9차례에 걸쳐 발굴조사 됐다. 그 결과 마한 600년 역사문화를 중단 없이 보여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대의 마을생활유적으로, 고대 한․중․일을 연결하는 연안해로상의 국제무역항으로 밝혀졌다. 중국~대방(황해도)~남행~(해남반도)~동행~김해~왜국으로 연결되는 해로에서 백포만의 군곡리는 중간기착항에 해당한다.
일례로 큐슈에 있었던 고대 왜국은 238년 6월에 시작해 240년대까지 총 5차례 중국(대방)에 사신을 파견했다. 당시 항해는 반드시 연안을 흐르는 조류를 이용해야 했고, 식량과 물, 땔감 등을 보급받아야 했다. 이때 왜국이 백포만을 중간기착항으로 이용했다는 증거들은 차고 넘친다. 멀고 험한 항해 중 안전을 점쳤던 점뼈들, 군곡 탄화미는 일본 쌀농사 시작과 관련성을 보여주고, 일본․낙랑․가야계의 토기, 일본 오끼나와 특산 조개팔찌, 2천 년 전 중국 동전인 화천, 제주산 토기 등의 출토가 그것이다.
군곡에서 제작된 유리구슬이나 철, 마한시기 호남 최초 3세기 가마터에서 생산한 경질토기도 수출됐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올해 배 모양 토기까지 출토돼 국제항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2021년 8차 발굴조사에서 국내 최초로 마한시대 거석 제사터와 관련한 큰 건물지와 시기를 달리해 중첩된 수 많은 집터들, 의례용 모형 토기들, 구리거울, 솟대 구멍 등도 확인됐다. 하늘에 대한 제사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왕만의 특권이다. 마한의 도읍지에도 천군(天君:하늘임금)이라는 제사장이 있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셈이다. 이런 복합유적은 전국의 마한지역에서 유일하다. 따라서 마한 신미국 도읍지의 위상으로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다.
해남형 전용 옹관은 마한풍습
해남지역에서 출토된 전용옹관은 특별하다. 매장용 옹관은 어른을 펴서 넣을 수 있는 크기이다. 송지면, 현산면, 화산면 삼산면, 해남읍 등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옹관을 묻은 묘는 작고 옹관이 1개씩 출토된다. 옹관 특이점은 몸 전체에 두드린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에 반해 타 지역 옹관들은 목 부분에 문양이 없다. 이를 ‘해남형옹관’이라 칭하며, 해남지역의 독자적인 옹관 생산방식을 보여준다. 또 부장품으로는 철제인 칼, 창, 옥, 덩이쇠가 출토되나 금․은이나 말과 관련된 마구․장식품은 출토 예가 없다. 이러한 부장품은 마한의 풍습 즉, 금은보다 옥을 소중히 여기고 말을 타지 않는다는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런 해남형 전용옹관은 기원후 400년이 지나자 곧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대신에 수십 미터급 대형 고분이 등장한다.
일본식 고분․유물도 마한문화?
전남 서해안지역의 옹관들은 해남형 옹관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삼포만 인근 즉, 나주의 반남, 영암의 시종, 무안의 몽탄면 대형옹관 고분은 550년 무렵까지 잔존했다. 이곳의 고분 특이점은 옹관을 계속 추가로 매장해 아파트식 고분이라 칭한다. 부장품은 금동관, 금동신발, 금귀걸이 같은 금붙이도 출토된다. 더욱이 옹관고분에서 일본식 원통형 토기까지 출토돼 고유한 마한의 전통에서 벗어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마한 고유문화라고 보기 어렵게 한다.
또 전라남도 서남부지역에는 기원후 500년을 전후해 전방후원형, 즙석분(돌로 표면을 덮음) 등 일본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대형고분이 등장한다. 이러한 고분에서는 금붙이 장식품과 기마에 필요한 말재갈, 안장, 발걸이 등 부장품이 출토된다. 이러한 요소는 전거의 고분들과 조성된 시기까지 마한으로 보기 어렵게 한다. 450년 이후 조성된 전남의 거대 고분을 ‘마한문화’로 호칭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다만 마한권 고대문화로 볼 수 있을 뿐이다.
호남 최초 4세기 마한 고분 확인
지난해 북일면에서는 호남 최초로 4세기 토착 마한인의 대형고분(직경 약 13m) 2기에 이어 거칠마토성 정상에서 거대 누각 건물지와 창고와 제사용 방울 등이 발굴됐다. 게다가 북일면 독수리봉 능선에서 가야의 고분군과 같은 열지어 조성된 집단 고분도 새롭게 확인됐다. 그동안 고대 일본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5~6세기 전방후원형의 돌방고분, 돌덧널고분, 돌장식 즙석고분과 유물들만 확인됐기에 학계에서는 북일의 토착 마한 수장세력이 왜의 세력을 수용해 변화한 것이라 해석했다.
한편, 북일면에는 산성 3곳과 고분 20여 기가 존재하는데, 이중 1984년 발견된 장고봉 고분은 전방후원형 고분으로 최초로 확인돼 한일 고대사의 논란을 제공했다. 전체 길이 77m, 높이 10m로 우리나라 최대의 단일 고분이다. 피장자가 생존 시 만든 최대 무덤이므로 그는 당시 최고의 세력가이며, 고대시기 활발한 한일 교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마한의 풍속 강강술래와 솟대
마한은 농경사회였다. 그들은 5월 씨를 뿌리고, 10월 수확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었다. 이는 한민족 고유한 원무 춤의 일종으로 강강술래의 발생설로 여긴다. 강강술래는 전라남도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유행했는데, 후기 마한지역과 일치하고 있어 경이롭다.
또 마한의 국읍(國邑:도읍지)에 설치된 소도(蘇塗)의 풍속이 지금도 전승되고 있다. 오늘날 솟대이며 해남 황산면 송호․원호 마을, 송지면 금강마을에 전한다. 해남은 마한신미국 600년의 도읍지로 무형유산까지 전승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