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가 다산초당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다산의 제자였던 치원 황상(黃裳)도 있었다. 황상은 다산이 강진시절에 만난 청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제자였다. 치자꽃 동산이라는 의미의 치원(梔園)도 다산이 황상을 위해 지어준 호다. 초의와 황상이 처음 만났을 때 초의는 24세. 치원은 22세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둘은 헤어진 뒤 40년이 지나도록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운명의 신은 두 사람을 다시 불러낸다. 
1849년 4월의 어느 날 해거름. 굳게 닫힌 일지암의 사립문을 흔드는 노인이 있었다. 둘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날 밤 두 노인은 20대 청년시절로 돌아갔다. 
“아이 불러 좋은 차 내오게 하고. 파계하여 술동이를 열어 마셨지. 얼마간 취한 듯 술이 깨서는. 느낌따라 작은 게송 지어주었네.” 명아진가명(命兒進佳茗) 파계개주준(破戒開酒樽) 일분혹취성(一分或醉醒) 부감방소게(赴感放小偈) 치원이 쓴 시다. 두 사람의 황혼길에 차와 시문과 편지를 주고받는 지란지교(芝蘭之交)의 축제가 펼쳐진다. 
사실 40년 세월을 뛰어넘은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다. 다산의 아들들과 황상은 다산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다산의 정씨(丁氏) 아들들과 제자 황씨(黃氏)사이에 정황계(丁黃契)를 맺고 천리길을 오갈 만큼 그들은 사이가 돈독했다. 초의는 초의대로 다산의 아들들, 추사와 추사의 형제들과 내왕하면서 소식을 나누고 있었다. 다산으로 해서 맺어진 인연이 해남-강진-한양을 사이에 두고 거대한 산맥을 이룬 셈인데, 초의나 황상은 그 산그늘에서 잠시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초의와 황상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서로의 소식이나 학문의 성취는 풍문으로 들을 수 있었기에 두 사람은 서로를 잊지 않고 늘 그리워했던 것이다. 
이제 일지암에 가시거든 초의ㆍ다산ㆍ추사ㆍ소치에 더해서 황상의 이름도 기억해주시기 바란다. 일지암을 아름답게 만든 사람들이다. 천년을 이어가는 향기는 장미의 향기도 모란의 그것도 아니다. 오직 사람의 향기 뿐이다. 대둔사 일지암에도 그 향기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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