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2월22일 대낮. 이재명 의사의 칼날에 이완용은 저승의 문턱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돌아온다. 의거에 연루된 한국인은 무려 25명.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끌려온다.
지강 양한묵 선생이 잡혀 온 것이다. 경찰은 양한묵을 이재명의 배후로 지목했으나 4개월 뒤에 석방한다. 증거가 부족했다. 필자의 추측이지만 양한묵이 나중에 3ㆍ1독립선언으로 투옥됐을 때 경찰은 1909년의 이완용 암살 의거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증거 부족으로 양한묵을 풀어줘야 했던 경찰은 10년 후에 다시 잡혀 들어 온 양한묵 선생이 눈엣가시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도록 고문을 가했는지도?
다시 1909년으로 돌아가자. 일본경찰의 심문조서에 따르면 양한묵이 이재명을 만난 것은 이용구를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동학의 간부였다가 친일로 돌아선 뒤에 한일합병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던 이용구는 제2의 이완용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재명의 동지들 가운데 김용문과 오복원은 천도교 신자였다. 양한묵은 천도교의 간부였으므로 세 사람은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러나 경찰은 양한묵 선생의 역할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1958년에 생각지도 못한 자료가 세상에 나온다. <신태양> 9월호에 ‘이완용 암살 의거 수기’가 실린 것이다. 수기를 쓴 사람은 이완용 암살의거와 관련해 7년형을 치르고 나왔던 김용문(필명 김동산)이었다.
“당시 나는 천도교 신자였다. 천도교 중앙총무부에는 양한묵씨와 오상준씨가 있었다. 두 분은 청년들의 지도자였고 우리가 진심으로 존경하고 숭배하는 어른들이었다. 나와 오복원은 두 분께 우리의 비밀 결사를 알리고 후원해 주기를 간청했다. 두 분은 크게 찬성하시고 이후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셨다. 뿐만 아니라 교주 손병희 씨에게도 소개해줬다.”, “이재명 의거 후에 나는 천도교당으로 갔다. 양한묵 씨는 우리 동지들의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장로요, 선배인 이 어른의 지도를 받자는 생각이었다.” <월간중앙> 2004년 8월호에 실려있는 수기 가운데서 일부를 옮겨왔다. 이완용 암살 의거를 계획하고 추진했던 청년들이 양한묵 선생의 지도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