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선/해남탐조모임새봄 활동가, 땅끝아해 대표
                 윤지선/해남탐조모임새봄 활동가, 땅끝아해 대표

 

 겨울은 맹금과 겨울눈의 시간이다. 사철 푸르던 남녘의 산들을 덮고 있던 초록이 조금 후퇴하고 바위들이 드러나면, 밤사이 내린 눈이 바위를 더 우뚝 솟아보이게 하며 산의 위용을 드러낸다. 바위 틈새 아늑하고 확 트인 곳에 둥지 튼 독수리 말똥가리 황조롱이가 봉우리마다 산자락마다 자리 잡고 이렇게 맑게 갠 날이면 상승기류를 타고 활강한다. 
그러나 이제 돈만 있으면 새보다 자유로운 존재가 된 인간에게 새는 방해되는 위험요소일 뿐이다. 애초에 갯벌을 매립해 짓고 있는 공항들은 새들의 이동통로에 건설되고 있는데 우리는 그 선주민들을 지운다. 
비행기 참사 소식을 들으며 또 애꿎은 새들이 미움을 받겠구나 싶었다. 새 따위가 무슨 상관이냐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오직 사람과 돈만이 중요해져 버린 세상에 사이의 존재는 쉽게 지워진다. 
이번에 광장을 지킨 존재들은 그간 보이지 않는 돌봄노동자로 사이의 존재로 지워지던 수평폭력의 희생자들이다. 이들은 영웅이고자 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 다른 시대로 제발 좀 넘어가자는 희생자끼리의 연대이고 공감의 발악이다. 
몇 년에 한 번 나의 권리를 대신해줄 사람을 투표로 뽑는 일만이 민주주의로 여겨지던 시대는 근대로 넘어오는 시점에 발명된 도구였을 따름이다. 이제 근대를 완전히 뛰어넘어서야 함이 분명해졌다. 표와 돈만 세는 이 현대적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있나? 
맨얼굴의 시간, 바위와 맹금만큼이나 나무들도 이 겨울 저마다 맨몸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화려한 꽃과 열매가 달려있을 때는 나무의 이름을 불러주기 쉽지만, 잎마저 다 떨군 이 겨울이야말로 나무를 공부하기 좋은 시간이다. 모두 떨구고 홑몸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나무에게는 저마다 고유한 선이 있다. 그 고유의 선이 나무가 한알의 씨앗에서 움터 수년간 자신의 길을 걸어온 발자국이다. 
농부들은 전정 작업으로 그 선을 일부러 끊어내 다음해 더 크고 많은 열매를 얻어내기도 한다. 전정하는 농부도 오래 한 나무를 붙잡고 씨름을 하다 보면 알게 된다. 그 나무의 결을. 나무의 선과 결, 떨켜와 겨울눈을 더듬는 안목과 시선을 갖게 된다. 
배꼽처럼 잎을 떨쳐낸 떨켜마다 드러난 체관 물관의 흔적은 그야말로 맨 얼굴의 표정 같다. 지난 계절 수많은 곤충과 새들의 먹이가 되어주었던 머귀나무는 은은한 미소 띤 하트 얼굴마다 동그란 겨울눈을 붙여 키워내고 있다. 두릅나무는 화려한 목걸이 같고 훈장 같은 브이자 마다 쌉싸름하고 달큰한 입맛으로 기꺼이 꺾여줄 맹아를 올릴 준비를 하고 있다. 
쌉싸레한 맛이 지독한 독감으로 잃어버린 입맛을 살려준다지만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며 맴도는 씁쓸함은 무엇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 나무마저도 표정을 드러낸다. 얼이 드나드는 굴이라서 얼굴이라는데, 지금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 
십여 년 전 마당에서 놀던 한 아이가 욕을 할 줄 몰라서 참고 참다가 분노 끝에 터트린 외마디가 생각난다. 이 대통령 같은 놈아! 이제 더 나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발명이 필요하다. 
어느 맹아를 남겨 키울 것인가. 전정하기 좋은 이 한겨울 김남주 시인처럼 낫을 들고 자연의 지혜에 귀 기울여보자.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민주성을 가진 맹아이다. 
순순히 가지치기 당하진 않으리. 내 권리를 내맡기지만 말로 지금 여기 자신의 공공성을 각성하며 풀뿌리 민주주의의 일상정치가 어떻게 자라나는지 두 눈 감지 않고 지켜보고 연결하며 키워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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