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가 탁 트이고, 작은 마당이 있는 고즈넉한 집에서 살고 싶다. 바다나 강가면 더 좋겠으나 꼭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그곳에서 삶의 무게에 허덕이거나 외로움에 지친 이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위로하는 삶을 살고 싶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제주의 둥구나무찻집에서 이런 일을 했었습니다.
둥구나무는 ‘크고 오래된 정자나무’란 뜻입니다. 동서양 모두 인생을 나그네 길에 비유합니다. 길을 걷다 보면 누구나 지치게 마련이고, 큰나무는 비나 햇빛을 피해 나그네들이 쉬어가도록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그 둥구나무의 역할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상대의 눈을 응시하며 침향을 사르고, 잔잔한 음악으로 긴장을 풀어줍니다. 따뜻한 차를 내려주면서 속마음을 충분히 말하도록 합니다. 그렇게 공감하며 토닥이다 보면 대부분이 조금은 홀가분한 얼굴로 돌아갑니다. 그래도 여전히 힘겨워 보이는 이들에겐 담요를 내주면서 말합니다. “저기 평상(툇마루)에서 한숨 자고 가세요.”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때 추적추적 비라도 내리면 묻습니다. “탁주 한 잔 할까요?” 제안에 응하면 다시 말합니다. “그럼 가서 막걸리 한 병 사오세요. 그동안 김치전을 부쳐놓을게요”해서 나눠 먹습니다. 손님으로 와서 친구가 되고, 또 비슷한 처지의 친구를 데려와서 새로운 친구가 만들어지는 곳. 이런 공간을 다시 시작한다면 심청(心聽)이라 하고 싶습니다.
재작년 11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허허로웠습니다. 그리고 자식으로서 30년, 남편과 아빠로서 30년을 살았으니 나머지 시간은 나만을 위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계의 틀에서 벗어나 졸릴 때 자고, 걷고 싶을 때 걷고, 배고플 때 먹고 그리고 오랫동안 모은 이야기들을 책으로 펴내면서 인생 3막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아내와 아이는 좋아하는 도시의 아파트에, 난 한적한 시골에 살기로 했습니다. 귀촌을 결심하고 담양, 부여, 홍성 등을 알아보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번번이 가벼운 주머니가 발목을 잡았지요. 그렇다고 나를 위해서 아내와 아이에게 큰 불편을 줄 수도 없으니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단순히 비용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전답은 농민이 아니면 구입하기 어렵고, 미등기 집이 많으며 건축물대장이 없는 집들도 수두룩합니다. 부동산업체에서는 실거래가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제시하고, 또 헐값에 산 농가를 겉모습만 번지르르 꾸며서 고액에 되파는 업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지난 7개월 동안 수많은 집을 살펴보면서 마음에 드는 집, 두 채를 찾아냈습니다. 백포리의 집은 매물로 나왔으나 건축물대장이 없고, 공동소유주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실제로 매각할지, 임대할지, 그냥 내버려둘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 섬으로 둘러싸인 내동리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평화롭습니다. 그곳을 산책하다가 매물로 나온 작은집을 보고 썩 마음에 들었습니다. 가격조정을 시도했으나 집주인이 ‘말도 꺼내지 말라’고 화를 냈습니다.
“외지인이 꼭 살겠다고 사정해서 그 집을 5백만 원에 팔아주었다. 그런데 1년에 한두 번이나 오가더니 1억이라니. 뭐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으로 내놓았냐? 마을 땅값만 왜곡시키니까 절대로 구입하지 말라”는 마을 분들의 권유대로 마음을 접었습니다.
해남으로 이사했고, 주소를 옮겼으나 정착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직 원하는 터를 구하지 못해서 사방을 기웃거리고 있으니까요. 기다림에 지쳐 떨어지기 전에 재미있는 공간이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