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우는 고등공민학교 3년을 마친 뒤에도 마음이 불편했다. 공민학교를 나오더라도 고등학교 입학 검정고시에 합격하지 않으면 고등학교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합격하더라도 고등학교에 갈 돈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남의 논 일곱마지기를 부치는 승우네에게 희망은 없었다.
1955년 봄, 승우네가 해남을 뒤로하고 광주로 이사 간 것은 운명이었다. 승우네 다섯 식구는 산수동의 외딴 마을 초가집 단칸방에 짐을 풀었다. 승우는 고향 선배의 주선으로 성실공업고등기술학교에 들어갔다. 승우는 이 학교를 다니면서 검정고시 준비에 착수했다. 쉬운 과목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 중에서도 영어가 가장 어려웠다. 승우는 광주 시내 학원을 다니면서 영어와 수학을 청강했다. 
이 무렵 승우네집에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다. 승우가 도비 장학생 시험에 합격해서 장학금을 받게 된 것이다. 
건어물을 취급하던 아버지도 세 칸 기와집을 지을만큼 장사가 잘 됐다. 승우는 새로 지은 집에서 마음껏 공부했다. 
승우의 목표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영문과였다. 대학을 나온 후에는 훌륭한 영어교사가 될 작정이었다. 그 당시 널리 알려진 백조사의 <정선영문법> 170쪽과 일지사의 <상설 영문법> 250쪽을 모조리 암기했다. 서울대 유진 교수가 쓴 <영어구문론>은 책값이 너무 비쌌다. 승우는 삼복서점에서 일하던 고향친구 오병희를 찾아가서 책을 외상으로 구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친구는 책을 건네주면서 책값은 걱정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했다. 고마운 그 친구는 고향 무정을 부른 가수 오기택의 형이었다. 600쪽이 넘는 그 책으로 승우는 영문법 공부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때 산더미 같은 먹구름이 승우네를 덮쳐왔다. 겨울 장사를 떠난 아버지가 서울에서 아는 사람에게 돈을 떼인 것이다. 
승우네는 곧 식량이 바닥났다. 이틀을 굶고 사흘을 굶는 날이 이어졌다. 승우가 열여덟, 병우가 열둘, 지우(시인)가 네살이었다. 
서울로 간 아버지는 소식이 끊어졌다. 큰아들 승우는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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