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팔월부터 시월까지 3개월 동안 ‘해남에 살아보기’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어디나 정들면 고향이라고 하지만 연고가 없는 곳에 정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기 나름이고, 스며들려 노력해야지요.
제주살이 8년 동안 수많은 손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눈인사만 주고받던 사람까지 찾아와서 민폐를 끼치기도 했지요.
지인 중에 언니는 동시인(童詩人)이고, 동생은 동화작가인 자매가 있습니다. 제주에서 1년 동안 살아본다기에 내 집에서 지내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바다가 보이고, 구백 평이나 되는 잔디마당의 한옥에 살고 있었거든요.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자신들은 제주방문이 일곱 번째라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덜컥 제주시청 근처에 오피스텔을 얻었지요. 나중에 내가 살던 집에 와서 큰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형(선배) 말을 들을걸. 오피스텔에 해가 들지 않고, 환기도 안 돼서 많이 힘들다” 했지요.
아무리 풍광이 수려해도 그것을 보러 가는 건 두세 번이면 족합니다. 계속 다니려면 마음이 잘 통하는 벗이 있어야지요. 북일면에 살면서 마을 행사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마을회관에도 열심히 다녔고, 얼굴도 모르는 분의 자녀결혼식에도 인사를 다녔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지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모르는 분들의 모임에 참석해서 어울리는 건 계면쩍은 일이지요. 그중에서도 제일 곤란했던 게 마을 관광과 장례식이었습니다. 마을 방송을 통해서 부고를 듣고 난감했습니다. 어떻게 하지? 조문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때 경사에는 안 가도 애사에는 꼭 다니라던 아버지 말씀이 떠올라서 용기를 냈습니다.
산림조합 장례식장으로 조문을 갔습니다. 영전에 인사를 드리고, 상주들과 맞절을 하는데 뻘쭘했습니다. 상주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갈까? 말까? 주민들의 관광 소식을 듣고도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마을 행사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여전히 모르는 분들이 많으니 가는 게 좋겠다. 이웃들과 봄가을로 관광을 다녔던 부모님의 놀이문화와 감정도 느껴보고 싶다. 하지만 음치인 내게 노래를 시키진 않을까? 버스 안의 시끄러운 음악을 견딜 수 있을까? 걱정도 됐습니다.
집 앞의 월성천 다리에서 관광버스가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당일 아침까지 망설이다가 인사만 하기로 했습니다. 버스에 빈자리가 많으면 자리를 채워서 갈 마음도 조금은 있었고요. 그런데 주민을 맞이하던 이장님의 권유로 관광버스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순천의 수석박물관과 화개장터, 그리고 구례의 화엄사를 다녀왔습니다.
출발할 땐 손발 장단을 맞추던 형님과 몇이서만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여러분이 가무를 즐겼습니다. 흥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버스 안의 조명과 음악이 뚝 끊겼습니다. 불이 났다는 기사의 방송을 들은 사람들이 창에 손을 대고,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구급차와 소방차가 바쁘게 오갔습니다. 저마다 걱정하는 모습이 정치인들보다 훨씬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목일 저녁에는 노인회 주최의 식사 자리가 있었습니다. 바쁜 이장님의 참석이 늦어져서 예상보다 오래 머물렀습니다.
그때 노인회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는 다른 데 가지 말고, 이 마을에서 오래 살아.” 그 말을 듣고, 이제야 마을주민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서 뿌듯했습니다.
손동수 이장님에 대한 신월리 주민들의 신뢰가 두텁습니다. 집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불리한 조건에도 성실함과 유머로 주민들의 화합을 잘 이끌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에, 주민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는 마을 방송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