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봄, 광주사범대학을 졸업한 승우는 전남대 영문과에 들어간다. 좋은 교수님들 밑에서 영어공부에 매진하는 꿈같은 날들이 펼쳐진다. 
그러나 5월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군인들이, 여관 행상을 ‘무허가 잡상인’이라며 철퇴를 내렸기 때문이다. 생계수단을 잃은 승우네 가족은 끼니를 거르는 날이 늘어갔다. 대학공부도 자연스럽게 중단됐다. 이때 군에서 통역장교를 뽑는다는 소식이 들렸다. 줄잡아 1,000명이나 되는 경쟁자를 물리치고 4명의 합격자가 나왔다. 그 가운데 승우가 들었다. 
통역장교가 된 승우는 다시 영어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폐결핵으로 시달리고, 첫사랑을 떠나보내는 슬픔이 있었지만 영어교사 자격증을 따냈다. 1965년 통역장교 황승우는 17연대장의 배려로 광주상무대로 배속됐다. “큰형님이 광주로 오셨다. 우린 이제 살았다” 중학교 2학년이던 황지우(시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황승우의 자서전「가시밭도 밟으면 길이 된다」(2015, 도서출판 책가)를 처음부터 읽어 온 독자라면 소년 황지우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광주로 온 승우는 낮에는 부대에서 번역을 하고 밤에는 시내 학원에 나가 영어를 가르쳤다. 강의는 대성공을 이뤄 황승우라는 이름이 시내 학원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6년 3월. 파란많은 통역장교 4년 임기를 마친 승우는 새내기 교사가 됐다. 목포고, 목포 문태중‧고, 광주 서중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문태중‧고 시절에는 전국 중학생 영어이야기 대회에 나간 제자들이 1, 2등을 차지하는 등 실력을 떨쳤다. 
그러나 4년 뒤에 승우는 제자들을 떠난다. 영어 발음을 더 배우고, 대학중퇴라는 이력도 지우고 싶어 전남대 영문과에 다시 들어갔다. 낮에는 대학에서 영어를 배우고 밤에는 사설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갔다. 
광주일고에서 근무할 때는 제자 윤영수 군이 코리아헤럴드에서 주최하는 전국 영어웅변대회에서 고등부 1등을 차지했다. 학원에서 길러낸 학생들까지 합하면 전국대회, 전남대회에서 수상한 제자가 스무 명도 넘었다. 발음과 억양, 감정 표현, 새로운 문장으로 이어지는 호흡 조절 등 혼신을 다해 가르친 값진 결실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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