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봄이 왔다.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부활할 것이라는 기대로 한껏 부풀었다. 그런데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됐다. 군인들의 총칼 아래 시민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때 황승우도 광주 금남로에 있었다. 그 후로 황승우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외신기자들이 시민들에게 다가왔다. “누구 영어하는 사람 없습니까?” 시민들이 외쳤다. 승우가 나섰다. 시민들(당신들은 광주시민들의 행동을 어떻게 봅니까?) 외신기자(평화적인 시위입니다.) 시민들(공수부대가 동족을 죽이고 있는 이 잔인한 행동을 어떻게 봅니까?) 외신기자(당신들은 공수부대의 동족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승우는 외신기자들을 데리고 169구의 희생자들이 안치돼 있는 상무관으로 달려갔다. 
승우의 활약으로 광주의 비극은 뉴스위크 등에 실려 세계로 타전될 수 있었다. 그런데 황승우는 광주의 비극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떤 고난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살아온 세상이 이런 곳이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 눈에 보이는 세상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허깨비 같은 세상을 버리고 진리를 찾아야 한다. 1980년 여름, 승우는 세상과 절교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이 무렵 민주화 운동을 하던 스님의 동생 황지우(시인)는 온몸이 부서진채 서대문 구치소에 갇혀있고, 황광우(철학자)는 행방불명이었다. 가족은 누가 찾으며 누가 먹여 살린단 말인가?
그는 가족도 세상도 모두 다 버렸다. 그의 절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1981년 마흔넷에 태고종 승려가 된다. 그리고는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에 들어갔다. 그의 석사학위 논문 제목은 <세익스피어의 비극에 대한 불교적 조명>이다. 마흔아홉살에 석사과정을 끝낸 승우는 전남 담양으로 내려왔다. ‘내가 뭘꼬’를 화두로 삼고 토굴에 들어 정진했다. 오래전부터 불경을 가까이하고 참선을 실천했던 그는 60일 만에 빛을 얻었다. 그는 ‘나의 실체는 본래 공(空)이다. 내가 없으니 기뻐할 것도 괴로워할 것도 없다’는 진리를 깨우치고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1980년에 문을 닫았던 황승우 영어학원을 다시 열었다. 그가 공부해온 영어를 청소년들에게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행과 전도를 위한 절도 지었다. 절의  이름은, 은사로 모신 청화 큰스님의 스승이었던 금타 스님을 그리는 뜻으로 금타선원(金陀禪院)이라 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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