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의해 22명 몰살
전남도, 심적암 현지실사

한말 마지막 의병투쟁장소였던 대흥사 심적암이 116년만에 문화유산 지정을 위한 현지조사가 실시됐다.(2019년 발굴조사 모습)
한말 마지막 의병투쟁장소였던 대흥사 심적암이 116년만에 문화유산 지정을 위한 현지조사가 실시됐다.(2019년 발굴조사 모습)

 

 대흥사 매표소 뒤편, 현무교 부근에 봉분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매표소 인근 계곡에선 흩어진 인골이 떠오르곤 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이후 조선군대마저 강제 해산시킨다. 그런데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은 간헐적으로 진행됐던 의병운동의 강화로 이어졌다. 
군대 해산에 반발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운동은 더욱 조직화되고 전 국토로 확산된 것이다. 또 군대 해산명령에 불복한 죄로 완도로 유배온 황준성과 추기엽 등 장교들이 현지 의병들과 합류하면서 의병활동은 더욱 체계화되고 규모화 된다.  
이때도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은 호남이었다. 임진왜란 때 바다에선 이순신이, 육지에선 호남의병이 조선을 구했듯 이때도 의병활동의 중심지는 호남이었다. 
이에 일본은 1909년 호남의병을 토벌하기 위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들어갔고 이로 인해 호남 의병들의 활동근거지는 해남과 완도 등 산악과 바다를 낀 남해안 일대로 국한됐다.  당시 해남과 영암, 완도 등지에서 주로 활동한 의병장은 추기엽(담양 출신, 완도로 유배), 이덕삼, 황두일(북평 이진출신), 황준성(전북 진안출신, 완도로 유배), 강성택 등이었다. 의병규모는 970여명에 이르렀다. 
해남 의병활동의 중심지는 두륜산과 달마산 일대, 주요 아지트는 두륜산 투구봉 아래였다. 특히 이곳은 인근에 성도암이 있어 식량조달이 용이했고 투구봉과 성도암 산봉우리에서는 왜군의 움직임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일본의 호남의병 대토벌작전으로 세가 축소된 의병들은 1909년 7월, 연합부대를 형성해 완도에 유배 온 황준성을 대장으로 추대했다. 통일된 의병부대는 성도암 전투에서 왜군에 밀려 미황사에서 재집결했다. 이때 의병수는 60~70명으로 줄어들었다. 식량 제공 처였던 성도암은 이때 일본군에 의해 건물 8채 중 6채가 전소되는 아픔을 맞았다. 
미황사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의병들은 산악 게릴라전을 벌이기 위해 1909년 음력 7월8일 대흥사 심적암에 당도했다. 그러나 의병들의 이동노선이 발각되면서 다음날 새벽 4시 일본 토벌대의 기습을 받아 전멸했다. 대흥사 심적암 전투에 대해 일본경찰문서 전남 폭도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1909년 음력 7월8일 밤, 해남수비대장 오시하라 대위 이하 22명, 경찰관 3명, 헌병 4명이 적도 토벌을 목적으로 대흥사로 출동했다. 1909년 7월9일 오전 4시 절을 포위 공격했는데 적도는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전멸했다. 적 22명을 죽이고 8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때 심적암 스님 5명도 현장에서 사망했고 심적암은 전소됐다. 
다행히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한 황준성은 보성, 순천 등지로 피해 다니다 12월7일 해남 경찰서에 자수했고 1910년 4월22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교수형이 확정돼 죽임을 당했다. 북평 이진 출신 황두일은 8월30일 부하 8명과 함께 해남수비대에 자수했다. 그는 재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그의 모습은 일제가 1910년 도쿄에서 발간한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南韓暴徒大討伐記念寫眞帖)’ 중 ‘폭도거괴(暴徒巨魁)’라고 표기한 후기 의병장 16명의 사진에 실렸고 사진은 대구형무소에 남아있다. 
심적암에서 사망한 의병들의 시신을 한데 모아 지금의 대흥사 매표소 뒤편에 묻었다는 이야기는 오래도록 구전돼 왔다. 그리고 봉분이 훼손되면서 흩어진 인골들이 대흥사 현무교 인근에서 자주 발견됐다는 이야기도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한편 심적암 전투로 전소된 대흥사 심적암은 110년 후인 2019년 발굴조사로 세상에 드러났다.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 3동과 우물지 1동, 문지 1곳이 확인됐다. 그리고 최근 해남군은 심적암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한 신청서를 전남도에 제출했고 이에 지난 6월11일 전남도의 현지실사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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