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근/작가, 성평등과 자녀교육 강사
오성근/작가, 성평등과 자녀교육 강사

 

 세월이 지나도 꾸준히 만나는 이가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이도 있습니다. 학교나 사회에서 인연 맺은 사람만이 아니라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자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나서 반갑고, 즐거우면 관계가 지속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이십 대의 나는 고집불통이었습니다.
“야, 말 좀 붙여도 되냐?” 벤치에 앉아있던 내게 키가 껑충하고, 부리부리하게 생긴 남학생이 물었습니다. ‘이 녀석은 뭔데 귀찮게 하지?’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법학과생인 녀석과 배짱이 맞아서 바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형, 말 좀 붙여도 될까요?” 학교 잔디밭에 누워있을 때 한 여학생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오라버니라고 부른 유일한 후배였습니다. 같은 과의 동기 여학생들도 나를 꺼렸습니다.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데모에는 빠지지 않는 모습이 낯설고,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불편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나이 탓인지 많이 유연해졌습니다. 의견이 다른 사람의 말에도 ‘그럴 수 있지’ 하게 되었습니다. 내 생각을 고집하기보다는 상대의 말을 경청하면서 의견을 조정합니다. 타인과의 관계도 어려우나 가족과의 그것은 훨씬 더 힘이 듭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만나서 편안함을 느낀다면 상대방이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라’ 마음에 새겨둔 책의 한 구절입니다. 저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른 만큼 생각과 생활 습관도 다른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가정을 꾸리면서 배우자와 자녀가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파탄의 시작입니다. 
가정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도 조심해야 합니다. 어쩌다 찾아오는 친인척이 불편하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럴 때가 제일 곤란합니다. 진심으로 조언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사이가 멀어지니까요.
얼마 전에 두 아이를 데리고 놀러 온 동생이랑 딸아이의 방문이 겹쳤습니다. 그때 딸이 많이 놀라고, 불편해했습니다. 아이들이 놀면 소란스럽기 마련입니다.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기보다는 그냥 둬야지요. 형제나 자매끼리, 혹은 남매가 앉아서 오순도순 노는 건 잠깐씩밖에 가능하지 않은 일이니까요. 온종일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말은 한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는 지표입니다. 아이들이 욕을 해도 불편하고 한심한데 성인이 그러는 건 정말 꼴불견입니다. 툭하면 화를 내며 욕하고, 또 금방 헤헤거리는 건 아이들이나 반려동물 모두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딸이 말했습니다.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더니 때리는 줄 알고, 움츠러들더라고. 불쌍하니까 아빠가 데려다 키우면 안 되냐고?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생인 아이가 스스로 인사할 줄 모릅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치를 보면서 온종일 게임만 하려고 합니다. 밥을 잘 먹지 않고, 편식하며 간식만 탐합니다. 식사 뒤에는 양치하고 씻는 게 당연한데도 몇 번이나 소리쳐야 겨우 움직입니다. 제 아빠가 화를 내도 그러려니 하고 맙니다. 또 금방 헤헤거리면서 “뭐 먹을래?” 할 걸 뻔히 아니까요. 부부간에도 방귀를 트느냐, 마느냐는 방송에서 자주 우려먹는 소재입니다. 그런데 형수나 다 큰 조카 앞에서 뿡뿡거리는 건 정말 민망한 일이지요. 만남을 지속하려면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면 좋을 텐데 그럴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이제 안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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