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 대학시절 배낭 하나 짊어지고 여행을 떠났다. 게스트하우스 거실에 앉아 처음 만난 여행자들과 인사를 나누면 대화는 늘 비슷했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 “이름은 뭐야?” 거기서 끝이었다. 무슨 전공인지, 몇 학년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서로 구태여 묻지 않았다.
내가 속한 학교 이름을 말해도, 아마 들어본 적도 없을 터였다. ‘연세대’라는 말은 한국 안에서는 나를 소개하는 유효한 레이블이었지만, 거기선 무의미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내 소속이나 ‘정체성’이 아니라, 이 순간 함께 여행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나’였다. 이름조차도 본명이 아닌 별명으로 불렀다.
당시 나는 낯설면서도 해방감을 느꼈다. 이름도, 학교도, 나이도, 집단도 없이 나를 소개할 수 있다니. 어떤 소속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나. 나는 누구인가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그렇게 길 위에서, 나는 처음으로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나 자신으로 살아보는 감각을 맛봤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해남에 산다. 얼마 전, 집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PD는 이렇게 말했다. “소개 멘트에 ‘구름이 엄마’라고 넣어도 될까요?” 나는 웃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구름이는 내 강아지다.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고, 나의 하루를 함께 살아가는 가족 같은 존재다. 하지만 나는 구름이와의 관계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구름이 엄마’라는 호칭에 내가 살아온 모든 이야기를 가둘 순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대신 이렇게 말해줬다. “그보다는 ‘시골집을 고치는 회계사’라고 해주세요.” 그 말을 들은 PD는 지금도 회계사냐고 되물었다.
그 질문을 듣고 나도 잠시 생각하게 됐다. 회계법인을 다니고 있지 않은 나는 회계사가 아닌가? 나는 여전히 회계사다. 자격증은 유효하고, 시험을 통과했고, 실무를 익혔고, 지금도 세무 상담이나 회계 교육을 하며 간간이 일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나를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나는 이제 회계사일 뿐만 아니라, 직접 공간을 고치고, 텃밭을 일구고, 마을과 연결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무엇보다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을 스스로 구성해나가는 사람이다.
나는 무엇을 ‘소유’했고, 무엇이 ‘나’인가. 내가 ‘소유한 것’과 ‘나 자신인 것’은 다르다.
회계사 자격증은 내가 소유한 것이다. 지금 머무는 집도, 사랑하는 강아지도, 내가 일구는 브랜드도, 운영하는 사업체도, 모두 내 ‘소유’일 뿐이다. 그것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지, 내가 ‘누구인지’를 곧장 말해주는 건 아니다.
나는 늘 변한다. 한때는 숫자에 파묻혀 밤을 새우며 회계법인에서 일하던 사람이었고, 또 한때는 축제와 캠프를 만들어 청년마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람이었고, 또 어떤 때는 흙벽 위에 단열재를 붙이며 ‘이 집의 물은 어디로 흐를까’를 고민하던 건축주였다.
나의 이름도, 나의 직업도, 나의 관계도 계속 변해왔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는 지금 누구로 살고 싶은가’를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는 감각일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지금 뭐 하세요?” 예전에는 그 질문이 무서웠다. ‘뭐라도 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강박, ‘쓸모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스스로를 작게 만들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느 때보다 유연하게, 나를 이렇게 소개할 수 있게 됐다. “해남에서 집을 고치며 살아가는 김지영입니다.” 이 말 속에는 내가 걷고 있는 시간,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 내가 선택한 삶의 방향이 담겨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어떤 소속도, 직함도 없이 이름 없는 여행자처럼, 나는 오늘도 나를 살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