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와 겸재 풍경 빌려온
프랑스 작가의 시선
땅끝순례문학관 전시관
2025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가 막을 올린 가운데, 해남읍 연동 땅끝순례문학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이하는 작품이 있다. 높이 2m, 너비 4m에 달하는 3폭의 대형 병풍 회화다. 첫인상은 강렬하지만 익숙하다.
묵직한 색감, 여백의 운용, 말 위의 선비와 그 뒤로 펼쳐진 산수의 구성까지, 누가 봐도 동양화의 정석이다. 이 작품을 그린 이는 조선 화가가 아닌, 프랑스 작가 로랑 그라소이다.
그라소의 작품 제목은 ‘과거에 대한 고찰’이다. 단지 과거를 묘사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오늘의 시선으로 어떻게 인식할지를 묻는 회화다. 공재 윤두서와 겸재 정선이라는 조선 후기 거장들에게 오마주를 바치며, 그들의 화풍을 빌려온 듯하지만 실은 완전히 새로운 감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실재와 상상이 교차하는 미묘한 지점을 정교하게 포착하고 있다.
작품 왼쪽은 공재 윤두서의 작품이고 중앙의 환일(포탈)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는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잔상을 상징한다. 오른쪽은 정선의 진경산수를 오마주한 작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회화가 전시된 장소가 바로 윤두서가 생전에 살았고, 정선이 산천을 그리기 위해 찾아왔던 해남이라는 점이다. 작가는 과거 조선의 화가들이 실제로 숨 쉬었던 공간에 자신의 작품을 걸어둠으로써, 시대를 초월한 회화 간의 대화를 성사시킨다.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과거의 정신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동양화의 화풍을 익힌 관람객에게는 더욱 흥미로운 체험이다. 익숙한 듯 낯선 이 회화를 통해 우리는 ‘동양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로랑 그라소는 파리와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현대미술 작가다. 과학과 철학, 공상과 신화를 넘나들며 시간과 인식, 실재의 경계를 질문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의 시선은 한국 전통회화로 향했고, 그 결과물이 이 비엔날레에 출품된 ‘과거에 대한 고찰’이다. 동양화의 어법을 빌렸지만, 그 안에는 철저히 현대적인 사고와 서구적 추상, 그리고 시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교차하고 있다.
수묵비엔날레는 단순히 전통 수묵을 계승하는 자리가 아니다. 해남이라는 물리적 공간, 고전 회화를 빌린 현대 작가의 시도,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는 오늘의 관람객까지.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시공간 안에서 중첩되며, 관람이라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사유의 장이 된다. 입구 정면에 걸린 이 한 폭의 회화는, 관람객이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수묵비엔날레는 바로 이런 순간에 빛을 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