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 어머니를 여의고, 많은 생각과 긴 방황을 했습니다. 부모님의 바람대로 되진 못했지만 나름 자식으로서 역할을 하느라 30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30년은 남편으로서, 또 아빠로서 애써왔지요. 대부분이 겪는 삶의 궤적이었습니다.
살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그걸 알 순 없으나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나만을 위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졸릴 때 자고, 배고플 때 먹고, 걷고 싶을 때 걸으면서 나의 호흡대로 원하는 일만 하고 싶었지요. 대부분의 바람이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누군가 고향을 물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고향은 천안이지만 유년기는 서울에서, 그리고 초중고는 안양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안양과 천안 모두 아파트촌으로 바뀌었고,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유유자적을 좋아하는 내겐 너무 가혹한 곳으로 변했지요. 한곳에서 오래 살면서 이웃들과 같이 늙어가다 죽을 새로운 고향이 필요해졌습니다.
집이나 땅은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옳은 말이지만 내게는 ‘가슴설렘’도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입니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소쇄원이 있는 담양을 한동안 알아봤고, 정림사지 오층 석탑이 있는 부여에서도 살아보았습니다. 하지만 가격이 비싸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부여에서 살아보기가 마무리될 즈음에 퍼뜩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서울공화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서울과 제일 먼 곳은 집이나 땅값이 조금은 저렴하지 않을까?’ 젊은 날에 땅끝을 찾았던 좋은 추억과 소싯적에 같이 문학 공부했던 친구의 권유로 ‘해남에 살아보기’를 신청했습니다.
해남에 내려오기 전에 인터넷에서 마음에 든 매물을 발견했습니다. 실제로 집을 보고, ‘이곳에 살면 소멸(消滅)될 수밖에 없는 마을을 되살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집을 매수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건축물대장이 없고, 공동 소유주 중의 한 분은 “해남윤씨가 아니면 팔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래서 왕건이 ‘지방의 토호 세력을 경계했고, 정략결혼을 했구나!’ 싶었지요.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해남에 살면서 조금 더 기다려볼까? 살아보기가 끝나가던 작년 시월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후자를 택했습니다. 원데이 클래스로 진행된 커피 수업에 참여했던 아가씨가 ‘그 집은 자신의 집안 소유라면서 내부적으로 정리되면 제일 먼저 알려 주겠다’고 한 말을 믿어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때 북일면에 ‘작은 학교 살리기’로 나온 집이 있다는 걸 알고, 계약했습니다. 오랫동안 어린이도서연구회 회원으로서 해왔던 지역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기와 글쓰기 자원봉사를 이어가고 싶었습니다. 해남에서 유일하게 카페가 없는 면에서 그것을 운영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북일초등학교 학부모와 친해지고 싶어서 이사하자마자 학교 바자회에 참석했습니다. 탁자와 물건들을 나르고, 인터넷신문인 <한겨레:온>에 기사도 올렸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분들의 경조사는 물론이고, 마을 관광과 마을 가꾸기에도 참석해왔습니다. 지난겨울, 협업했던 장소의 계약이 만료된다기에 조건을 물었습니다. YMCA가 직영한다고 해서 그만두었는데 나중에 보니 네일샵이 들어섰습니다.
이제나저제나 마음에 품은 집에서 좋은 소식을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입니다. 마을에 녹아들어 구성원으로 살고 싶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희망에 부풀어서 해남에 왔으나 인연이 닿지 않습니다. 새로운 고향을 찾기가 생각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