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에 접어든 세계 정세는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형세다. 민주주의의 든든한 맏형 역할을 하며 세계 질서를 주도해 온 미국이 트럼프 집권 이후 천문학적인 국채를 이유로 자국 이익만을 앞세우면서, 세계 각국과 관세를 둘러싼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여전히 영토 확장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이에 따라 유럽 각국은 군비 확충에 여념이 없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방산 무기 수출에 유리한 환경이지만, 이런 불안정한 국제 질서 속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국가 경영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아시안 회의 참석에 이어 10월27일부터 APEC 정상회의를 주최하며,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유리한 조건으로 마무리 지었다. 또한 핵잠수함 건조를 허가받아, 우리나라가 핵 기술을 군사적·산업적으로 활용할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 이와 함께 중국·일본 등 아시아 태평양 주요국 정상들과도 연쇄 회동을 이어갔다.
이재명 정부는 국가 균형발전의 일환으로 행정과 산업의 지도를 새롭게 재편하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임기 내에 행정수도를 세종으로 완전히 이전해 중앙부처와 국책기관을 세종·대전권으로 통합 배치할 가능성이 크다.
수도권 과밀화를 완화하기 위해 교통망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산업 역시 남부 벨트 중심으로 확장하려는 구상이다. 충청에는 AI·우주항공, 경남에는 배터리와 조선 첨단화, 전남에는 RE100·반도체·AI 컴퓨팅·데이터센터를 육성해 남부 전역을 잇는 신(新) 산업권 구상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의 거대한 구상 속에서 전남, 특히 해남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SK텔레콤과 오픈AI가 합작해 해남 솔라시도를 데이터센터 부지로 확정한 데 이어, 10월21일에는 국가 AI 컴퓨팅센터 사업 부지로도 같은 장소가 선정됐다.
이 사업은 삼성SDS, 네이버클라우드, 카카오, KT 등 국내 유수의 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정부가 일부 투자를 진행하는 형태로, 총사업비만 2조5,000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그동안 ‘땅끝’이라는 상징으로만 여겨지던 해남에 유례없는 산업이 열리는 역사적 순간이다.
데이터센터 구축에 필수적인 GPU(그래픽 연산장치)는 국내에 약 4만 장 정도만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APEC 회의의 CEO 서밋에서 엔비디아(NVIDIA) 젠슨 황 회장이 이재명 대통령과의 면담 자리에서 향후 5년간 한국에 26만 장을 우선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애초 정부 목표가 2030년까지 5만 장 확보였던 점을 고려하면, 이를 훨씬 상회하는 규모다. GPU는 자금이 있어도 수급이 어려운 핵심 부품이기에, 이번 발표로 해남 데이터센터의 추진은 한층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해남에 데이터센터가 들어서면 그와 연계된 각종 산업과 설비시설도 함께 조성될 것이다. 예컨대 냉각 시스템, 전력 설비, 네트워크 장비와 케이블 기업 등 관련 산업들이 잇따라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 나아가 SK 최태원 회장은 오픈AI 회장과의 회담 자리에서 반도체 공급망 확보를 위해 해남에 반도체 공장 설립도 검토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제 해남은 말 그대로 ‘기회의 땅’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 사업을 위해 노력한 모든 관계자에게 해남 주민으로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접고, 국가와 민족의 미래가 걸린 이 중대한 사업을 차분하고 치밀하게 추진해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