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는 처음에는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Anarchist였다. 그 결과물이 전남대 <함성>지라는 지하신문 사건이다. 김남주는 나중에 전사가 되었다. 민족자주, 민족통일, 민중해방을 꿈꾸며 실천하는 혁명가라고 할까? 그리고 자기표현으로는 시를 썼다. 시의 내용은 참여시, 해방시, 투쟁시, 혁명시라고 불리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김남주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라는 사건을 통해 전조직원이 동시에 검거되는 초유의 사건으로 전사로서의 면모가 드러나게 된다.
김남주는 우리나라 문단의 철학과 사상의 빈곤에 대해 대학시절 두고두고 고민했다. 자신은 시 한편을 쓰더라도 철학, 사상의 가치에 부끄럽지 않는 시를 쓰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민족의 현실과 질곡에 대해 변혁의 길을 가지만 자신은 언젠가 동양철학의 토대를 탐구해 변화와 혁명을 필요로 하는 동서양 어느 곳에서나 통용이 가능한 시 한편이나 글 한편을 남기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오랜 감옥살이로 철학, 사상에 대해 원숙한 연구를 할 기회를 상실했고, 9년여의 감옥살이 동안 비밀리에 우유팩이나 화장지에 써서 밖으로 내보내는 시들이 모두 혁명시, 투쟁시, 해방시였다. 김남주의 시들은 대부분 원숙미가 넘친다기 보다는 투쟁성이 강조돼 있다. 우리 민족이 찾아가야 할 이상향에 대한 목적의식적 잠재의식에서 미완성적인 면이 나타났으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김남주가 바라던 혁명은 미완성이기 때문에…
김남주는 농민적이다. 그래서 농민시도 여러 편 있다. 또한 김남주는 출세 지향적 인생관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광주일고 재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실행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2학년 때 자퇴했다. 대학시절에 학교수업은 가장 많이 빠지면서도, 스스로 도서관 또는 헌책방에서 구한 영서, 일서를 통해 진보적 독서를 많이 했다. 이러한 독서를 통해 김남주 자신은 전사로 발전하였으며, 그 결과 시를 썼고, 남민전의 일원으로 전사의 삶을 살았다. 김남주는 다차원의 인간관계 고리를 가지고 살았다. 그래서 근접관계 고리, 중간관계고리. 원접관계 고리 등으로 아주 다차원적이었다. 이와같은 인간관계에서 형성된 김남주의 면모는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박석무 선배는 김남주에게 물봉이라고 호를 지어주었다. 그러자 김남주는 스스로 (日勿蜂)이라고 한자로 자신의 이메지와 연결된 물봉으로 바꾸었다. 바로 이점이 김남주다움의 전형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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