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교단!
학생들의 교사 폭행, 성희롱까지. 연일 방송에서 가슴 아픈 소식을 듣노라니 축 쳐진 선생님들의 어깨가 눈에 그려져 씁쓸하기만 하다.
이제 더 이상 훈훈한 정이 넘치는 학교는 없는 것일까? 이럴 때면 언제나 그 시절을 돌아본다.
두해 전 전문직으로 전직을 하며 중학교 1학년 담임교사를 마지막으로 교단을 떠나온 그 날이 엊그제 인 듯, 4월이면 복숭아꽃 가득 물든 언저리에 포근히 자리했던 나의 마지막 교정 안 모습들은 내 머리 속 가득히 아련하게 떠오른다.
올망졸망 24명의 시골 아이들, 깨끗한 물만 주면 쑥쑥 자라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콩나물시루 속 세상이라 생각했건만 어찌 그리도 한스러운 사연도 많은지!
군내버스 시간 맞추느라 이른 아침 7시도 못되어 나란히 등교하던 4명의 아이들, 버스를 가장 먼저 타는 눈치의 달인이었던 아이는 홀로된 병든 아버지와 유난히 잔소리 많은 할머니 밑에서 자란 탓이었을까 늘 관심이 그리워 내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두 번째로 버스를 타는 녀석은 부모 곁을 일찍이 떠나 병들고 연로한 꼬부랑 할머니 댁에서 살았다.
곁에 사는 할머니를 닮아서인지 유난히 체구가 작아 더욱 안쓰러운 아이였다.
버스를 내려서도 외딴 산길을 홀로 40분 이상 걸어야 했던, 그래서 옆 동네 친구와 놀라치면 재를 넘나들어야 가능한 무척 외로운 아이였다.
차비 500원을 교실 안에서 잃어버리고 엉엉 울던 그 녀석의 한스러움에 눈시울 적신 날도 있었다.
엄마의 가출로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야 하는 이야기를 가진 녀석이 바로 세 번째 버스를 타는 아이였다.
그 녀석은 어느 날 성실히 해온 숙제를 수학 선생님이 보고는 칭찬하는 말과 함께 머리 한번 쓰다듬어 주었을 뿐인데 수학에 홀라당 빠져 버린 순박한 아이였다. 어찌 사연 있는 아이들이 그 뿐이었으랴. 마지막 아이 역시 태어나 따뜻한 부모의 정도 느끼지 못 하고 부모 얼굴도 모른 채 살아가는 처지였다.
그러나 더욱 마음이 쓰이는 것은 그 속에서 밝게 웃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어찌 4명의 아이들뿐이랴, 우리 반 절반이상 학생들의 이야기이기에 소풍 한번 갈라치면  왜 그리 챙겨 보아야 할 아이들도 많았던지 그런 담임의 맘을 읽은 양 엄마가 싸주셨다며 친구 몫까지 정성스레 내밀던 나머지의 아름다움 또한 잊지 못할 일이다  
화창한 봄날 도시에서 전학 온 남학생은 피아노에 바이올린에 공부도 잘하니 금상첨화, 거기다가 잘나가는 아이돌 그룹 얼굴까지 닮았다.
팬클럽 사인회를 하는 것도 아니거늘 쉬는 시간만 되면 시골학교 복도가 선후배 할 것 없이 여학생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장사진을 이루었던 그런 작은 세상이었다.
짧은 시간 함께했던 그곳 그 아이들의 울고 웃던 정겨움이 고스란히 묻은 ‘선생님 보고 싶어요.’하고 나를 찾아오는 아이들의 문자는 지금의 내 고단함을 말끔히 씻어 내린다.
아이들의 수만큼 각자의 사연 가진 아이들 속에서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우리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꿈과 희망의 별을 보기에 그래도 학교가 살아 숨 쉬는 것이 아닐지.
오늘도 성장하는 아이들과 토닥이며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고 있는 선생님들을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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