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약삐약. 달걀을 넣어둔 부화기에서 소리가 들린다. 이상하다. 아직 알은 하나도 깨지지 않았는데 어디서 나는 소리지. 어머나. 자세히 보니 동그란 알이 꿈틀거린다.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나 여기 살아있어!”라고 선언이라도 하는 듯한 삐약! 그 생명의 징조에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우리 암탉들은 알은 낳지만 품을 줄 모르는 서글픈 어미들이다. 태어나서 품어진 기억이 없는 닭들은 다 자라 자기 알을 낳고도 품을 줄 모르는가 보다. 그 어미 역할을 대행하기로 마음먹고 어미의 체온과 습도를 유지해주고 온도가 고르도록 종종 뒤집어주기를 스무하루 밤낮으로 지속했더니 들려온 소리가 바로 저 ‘삐약’이다.
소리가 난 후, 첫째의 탄생을 보기위해 새벽까지 기다리다 고꾸라져 잠이 들었다. 첫째는 다음날 낮이 되어서야 얼굴을 보여준다. 부리로 알을 콕 찍고 나서 열 두 시간이 지난 후이다. 그동안 알을 깨기 위해 얼마나 힘겨웠는지 나오자마자 고꾸라진다. 부화기 안의 생명이지만, 그 생명의 신비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렇게 힘겹게, 노른자 먹던 힘까지 다 해 태어나 움직이는 녀석들을 보며, 어릴 적에 좋아하던 소설 ‘데미안(헤르만헤세)’의 구절을 떠올렸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 세계를 깨고 나온 녀석들. 대견하고 한편 존경스런 마음도 인다. 태어나는 존재들은 저렇게 온 힘을 다하는 구나. 본성을 잃은 어미닭의 서글픔에도 생명의 신비를 발하는 그 탄생을 보면서, 생명이 있다면 어떻게든 본래자리를 찾아갈 거라는 믿음이 생겨난다. 저 아이들은 나중에 자기가 낳은 알을 품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지. 엄마 대행 제대로 해주어야지. 이런 결심이 생겨난다. 자연에서 태어난 닭들은 알을 낳으면 스스로 품어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해주고 수시로 알을 굴려서 골고루 따뜻하도록 해준다. 심지어 알을 잘 못 깨는 아이들이 있으면 부리로 쪼아가며 알 깨는 걸 도와준다고 한다. 그들은 자연스레 알고 있다. 우리 병아리들에게도 잃어버린 그 본능을 깨닫도록 도와주어야지.
우리는 어떨까. 지금은 실내온도조절기에, 기상청 일기예보에, 자동차에 자신의 감각들을 맡기고 사는 인간에게도 애당초 자연을 읽는 능력이 없지는 않았겠지. 현대인들은 많은 걸 잃어 가고 있는 게 아닐까. 편리함을 추구하며 사용한다는 에어컨, 보일러로 인해 자연의 온도를 예상하고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잃고 건설사와 전문가가 지어놓은 아파트에 살아가면서 집 짓는 본능을 잃고 정해진 제도에 맞추어 사느라고 스스로 삶을 만들어가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내 똥이 ‘똥’이 아닌 ‘거름’이 되는 삶을 살겠다고 귀농한지 1년. 해남 깊숙한 곳에서 살아가면서 자연으로부터 많을 걸 배우고 있다. 어쩐지 잃어버린 본성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현대 도시문명의 달달한 맛을 흠뻑 먹고 태어난 아이. 그런 아이가 자연을 제대로 느끼려니 버겁기도 하지만 참 고마운 시간들이다. 내게도 잃어버린 본성이 있다면, 그래 병아리들이 그러하듯이 찾아갈 수 있겠지. 그래서 점차 거름이 되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난 오늘도 그렇게 태어난 열다섯 병아리들에게 물과 밥을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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