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가 경찰공무원으로 근무하시던 계곡지서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경찰 월급이 박봉이라 어머니께서 이것저것 일을 했다. 그중 하나가 닭을 키우는 일이었다.
개구리를 먹이면 닭이 윤기가 난다며 어머니는 동네 꼬마들이 개구리를 잡아오면 약간의 돈을 주곤 했단다.
어느 날 큰개구리를 잡아 닭집에 넣어 주었는데 닭들은 그걸 먹지 못했다.
개구리는 밖으로 뛰쳐나왔고 이를 본 꼬마들은 “아줌마 개구리가 뛰쳐 나왔어요” 했다. 밭에서 풀을 메시던 어머니는 호미로 개구리를 죽였다.
산달에는 동물을 죽여서도 봐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자 어머니는 걱정이 되었고 그 순간 진통이 시작되면서 나는 태어났다.  
태어난 아이의 몸은 개구리 알처럼 번져 있어 어머니는 조왕신께 빌고 또 빌었단다. 일주일 되던 날 온몸에 있었던 여드름 같은 물집이 저녁에 사라졌고 개구리처럼 두 손 짚고 기어 다니던 아이는 굿을 하고 난 후 한 손씩을 번갈아가며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큰누나 등에 업혀 초등학교 1학년을 다녔는데 큰누나의 엄격한 교육 덕분에 전교에서 상위권을 달렸다. 2학년 때부터는 혼자 다니기 시작 했지만 늘 넘어져 무릎엔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친구들의 놀림과 괴롭힘에 성적은 뚝 떨어졌고 이는 고등학교까지 계속 이어졌다. 나를 괴롭히는 친구 때문에 죽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대학 때는 서클에 가입해 친구들을 사귀었다. 방송통신대에 편입한 1991년 여름 갑자기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해 새어머니를 받아들이질 못했다. 그때부터 술로 세상을 보냈다. 그렇게 방황하며 술값을 카드로 계산했고 돌려막기 하면서 신용불량자가 됐다. 내가 정신 차린 것은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이다. 새어머니는 자신의 딸집으로 가고 한 달간 아버지를 모셨다.
2007년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나의 카드빚을 갚아 주셨다.
2009년 가을 베트남 여성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2010년 7월 드디어 아내가 아기를 가졌다. 그때의 기쁨은 뭐라 표현할 말이 없다. 그런데 11월말에 장모님이 많이 편찮으시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임신 7개월인 아내와 함께 베트남에 갔다. 아내는 그곳에서 일을 많이 해서인지 한국에 오자마자 조산기가 있었다. 다행히 아기가 엄마 배속에서 잘 자라고 있다는 의사의 말에 안심을 했다.
다음해 2월 장모님이 돌아가시자 나는 베트남에 조의금을 보내주고 아내를 위로했다.
나는 집사람이 먹고 싶어 하는 것은 비싸더라도 술 한 번 안 먹고 사주려 노력하고 그렇게 해왔다. 올 3월 밤 열시에 아내가 진통을 시작해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두말도 않고 알았다면서 달려와 준 고마운 친구, 그 친구차로 병원에 갔다.
여덟 시간이 넘는 진통 끝에 아내는 딸을 낳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 눈물이 나왔다. 아내는 아직까지 한국말을 잘 못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잘 적응하고 있다.
저희 부부에게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나는 장애인복지관에서 일을 한다. 보수는 작지만 휠체어 타신 분을 도와주거나 청소를 하고 나면 나도 모르게 보람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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