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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가 극성이던 그 해 여름밤, 분명 한 말씀 하고 눈을 감고 싶었을 텐데…. 옆에서 잠깐 졸아버린 아내와 마루에서 세상모르고 잠에 골아 떨어진 아들을 두고 한마디 말도 남기시지 못한 채 아버지는 그렇게 외롭고 쓸쓸한 길을 떠나셔야 했지요. 그때는 왜 그리 속이 없었을까요.
아버지는 다시 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면서 차마 눈에 밟히는 어린 자식의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어 마지막 힘을 다해 허공에 훠이훠이 손이라도 휘저었을 지도 모르는데요.
아버지 오늘 문득 아버지의 삶을 돌아봅니다. 뇌성마비였던 형의 병원비 때문에 서울 살림 정리하고 빈 몸으로 해남에 내려와 저를 낳고, 밑으로 딸 하나를 더 낳으셨죠. 40년 전 이야기니 그때의 살림살이야 오죽했겠습니까?
20년이나 가슴 아프게 키웠던 형을 아버지의 가슴에 묻던 날을 기억합니다. 멍하니 밤하늘만 바라보시던 아버지, 제가 지금 그 상황이라면 저 또한 아버지의 심정이겠지요.
제게 아버지는 무서운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때는 왜 그리도 무서웠는지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진지 잡수세요.” 이런 인사들이 대화의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항상 토닥여주고 얘기 들어주는 어머니하고만 재잘거렸지요.
돌아보면 아버지의 낙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는 게 재미없고 외롭지는 않으셨는지요. 그 외로움에 길들여져 가실 때도 그렇게 배웅도 받지 못하고 떠나신 건가요?
고단한 일과 외로움 때문에 술·담배와 벗하며 지내신 세월, 그래서였을까요? 그래서 아버지의 위속에는 몹쓸 것이 자라고 있었던 것일까요? 제가 군복무 중에 암 제거 수술을 했지요. 그 후 아버지는 1년 만에 가슴속에 묻어둔 형을 찾아 떠나셨구요.
그때는 그렇게 빨리 떠나실 줄 몰랐습니다. 좋아하시는 술 한 잔 못 따라드리고 임종도 못 지킨 것이 두고두고 이렇게 가슴에 한으로 남을 줄 몰랐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보다 즐겁고 좋은 일이 있을 때 아버지 생각이 더 나는 건 왜일까요.
아버지를 아시는 분들이 가끔 말씀하십니다. “참 좋은 사람이었는디. 느그 아부지 살아계셨으먼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며느리 무지하게 이뻐했을 것인디.”하고요. 저는 아이들에게 어떤 아빠로 남을까요. 저는 친구 같은 아빠를 꿈꾸지만 오늘도 아들 녀석에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이제 아빠가 되고 보니 그때 엄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게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이었다는 것을요. 지금도 우리 가족을 지켜보며 돌봐주시고 계실 아버지, 사랑합니다.
돌아오는 기일에는 어머니, 며느리, 그리고 아이들이랑 정성껏 음식 올릴게요. 어머니 보고 싶어도 참으세요. 제가 아직 놓아드리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 못다한 몫까지 사셔야 하잖아요. 아시죠? 한 20년만 기다리세요. 외로움은 아버지의 벗이었잖아요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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