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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란 어떤 존재일까? 나도 지금은 엄마다. 그런 내게 내 엄만 어떤 존재일까? 엄마에겐 내가 아이였었다. 내 이름을 가진 아이였었고 딸이었다.
그런데 살다보니 내 나이 서른이 넘어서면서부터는 엄마에게도 “누구 엄마야”라는 이름으로만 불리는 여자가 되었다. 가끔 나는 엄마이름을 불러본다. “최정숙 여사님” 아니면 “정숙씨”
요즘도 나는 엄마 앞에선 처녀 때나 지금이나 늘 뒹굴뒹굴 게으른 딸이다. 엄마는 나이가 병이라고 파스며 보호대를 몸에 달고, 나이만큼이나 몸의 움직임도 힘겨운 60대의 할머니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시댁엘 가면 밥이며 찬이며 설거지며 이 모든 일들이 너무나 당연한 내일인데 친정엘 가면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은 뒹굴이가 되면서 투정꾼이 되는지 모르겠다.
부모는 자식을 바라보는 자식바라기 꽃이라고 했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다 결국 까맣게 그 속이 타들어가 열매를 맺으면서도 고개를 숙이는 이유가 오매불망 해에게 고맙고 감사해서란다. 늘 자식만 바라보며 사는 삶. 내가 내 자식을 보면서도 나는 서슴없이 “나는 아이바라기꽃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왜 ‘부모바라기 꽃’은 못될까? 내리사랑이라서 그런가?
자식은 사는 나이만큼 엄마 마음을 헤아리는 것 같다. 아이를 낳았을 때 처음 엄마 마음을 헤아려 감사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그 존재성을 깨닫고, 아이를 보면서 웃고 울고 하면서 우리 엄마도 그랬구나하며 미안해하고, 죄송스런 마음에 철이 좀 드나싶다가도 금방 언제 그랬냐 싶게 잊고 산다.
저만치 앞서가는 그 마음을 늘 뒤쳐져서 후회라는 다리를 건너면서 오십보 뒤쳐지고 백보 뒤처지고…. 부모가 언제까지나 기다려 주지 않는데도 결국 깨닫는 건 그 큰 자리가 비워져서야 깨닫는 바보. 딸은 바보다.
<친정엄마>를 보면서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공감이 되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아마도 똑같이 우리는 엄마의 ‘딸’이란 이름으로 살기 때문일 게다. 엄마를 바라보는 모든 딸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머 어쩌면 똑같아 똑같아”를 연발하며 반성하고 “어머 다들 이렇게 사는가보다.”하며 한편으론 조금은 스스로를 위안하는 얄팍한 생각이 그 와중에도 스쳐지나간다.
에고 못난 딸. 나는 못난 딸이다. 책을 보며 가슴 찡해 울기도 하고 엄마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가슴에 기대 “엄마, 미안해, 엄마, 사랑해”하고 고백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처럼 솟구쳤다. 하지만 막상 입 밖으로 꺼내질 못했다. 참 못나고 용기 없는 딸이다.
엄마와 함께 둘만의 여행을 하고 싶다. 지금까지 여행은 늘 부모님과 함께하면서도 아이들이 있기에 결과적으로 늘 아이들 중심이었던 것 같다.
이젠 단 한 번만이라도 내 엄마와 내가 어렸을 적 엄마 손잡고 졸랑졸랑 따라다녔던 그 모습을 생각해보며 이제는 내가 엄마 손을 잡고 느릿느릿 함께 가는 여행을 하고 싶다. 꼬옥 가고 싶다. 엄마와 나 둘만의 여행.
그리고 그 여행 뒤에는 내 딸과 내 딸의 엄마, 내 딸의 엄마의 엄마와 함께 맛있는 밥을 먹고 싶다.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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