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아이는 남편과 두 명의 이웃 도움으로 집에서 낳았다. 집에서 아이를 낳기로 한 데에는 몇 가지 필요충분 조건이 있었다.
셋째 아이를 낳으러 조산원에 갔을 때 원장님의 혼자 낳아보라는 조언 때문이었다. 아 이쯤이면 혼자 낳을 수도 있구나. 신선한 깨달음이었다.
두 번째로는 우리집 닭들과 농사짓는 작물들 덕분이다. 처녀닭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을 낳고 새끼를 품어 키우는 법을 알고 있었다. 동물과 식물들은 자손을 뿌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콩이 꼬투리를 맺고, 고추, 옥수수가 열매를 맺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는 이곳의 열악한 조건 때문이다. 이제 병원 출산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고 설우와 새미를 낳았던 조산원은 너무 멀었다.
네 번째는 세 아이를 낳는 동안 함께 해 온 남편 덕분이다. 세 아이 출산을 함께 했기에 과정을 얼마만큼은 알고 있을 테고 충분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동네에서 산파 역할을 해 줄 나이든 아주머니를 찾아보려 했을 때 다들 낳기만 했지 받아준 건 시어머니고 당신들은 전혀 모른다고 절레절레 하는 것에 비하면 남자지만 우리 남편이 훨씬 든든한 산파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마지막 닭들처럼 식물들처럼 정말 한 마리 암컷으로 제 역할을 하고픈 강한 나의 바람.
가능하다면 앉아서 내 손으로 내려오는 아이의 머리를 받쳐 들고 낳고 싶었다. 예정일을 두 달 앞두고 두 번째 방문한 산부인과, 완전 미개인 취급을 받으며 고운맘 카드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진료비 40만원 지원이라….
집에서 낳는다니 걱정하는 지인들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무모한가 되물었다. 그렇지만 나에게 무모한(?) 조언을 해준 의료인도 있지 않은가. 나는 나와 아기와 닭들과 우리 작물들을, 자연의 조화로움을 믿기로 했다. 탯줄가위는 미용가위를 소독해서 쓰고 탯줄집게는 옛사람들처럼 무명실로 하기로 했다.
6월 7일 아기가 태어나던 날, 강연이는 조퇴하기로 하고 설우와 새미는 어린이집을 쉬었다. 그 시간이 왔다. 낮 1시 반이다. 힘을 주기 시작했다. 양수가 터져 나오면서 드디어 뭔가 뜨거운 것이 나왔다. 머리가 나왔나 했더니 양수막이다. “나온다, 나온다”하던 남편이 어! 하는 사이 다시 몸이 뜨거운 것을 토해냈다. 머리가 나왔다.
“힘을 빼” 남편이 말했지만 어깨가 걸린지라 힘 빼기가 쉽지 않아 힘을 줘버렸다. 어깨가 쑥 빠지며 마침내 꿈이가 나왔다. 탯줄이 달린 채로 아이는 내 품에 안겼다. 곧 세차게 울기 시작했다. 탯줄을 잘랐다. 무명실로 두 군데를 단단히 여미고 그 사이를 가위로 잘랐다.
그래도 안심이 안 돼 아이가 달고 있는 탯줄 한 곳을 더 묶었다. 그러는 사이 40분이 지났는데 태반이 나오지 않는다. 조산원에 전화를 했더니 배가 아플 때 맞춰서 탯줄을 잡아당겨 태반을 빼란다. 남편이 탯줄을 당긴다. 끊어질 것 같다며 소심해진다. 에잇, 할 수 없다. 힘을 주었다. 태반도 아이처럼 쑥~ 하고 나온다. 아! 시원하다. 이제 모두 끝났다.
아이의 몸무게를 재고(3.5kg) 깨끗해진 엄마와 아기가 마주 누웠다. 젖을 물렸다. 잘 먹는다. 네 아이의 엄마가 된 시간이다.
장하니씨의 출산기는 http://blog.naver.com/vacuum74/40131905055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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