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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열매로 가는 과정에서 피어나는 영혼의 현상이다. 자기 복제를 위해 꽃은 벌 나비를 유혹한다. 하지만 꽃의 유혹은 밤거리의 여인처럼 흐물거리지 않고 그렇다고 냉정한 도시녀의 마음처럼 닫혀있지 않다. 무위한 자연처럼 맑은 유혹. 꽃은 필요한 만큼의 마술을 부려 열매를 맺는다.
능소화, 내가 처음 이 꽃을 알았을 때, 모양과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소녀처럼 깔끔한 코스모스의 청순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농익은 여인네 같은 동백의 요염미도 아니고, 현란하지 않으면서 화려하고, 촌스럽지 않으면서 수수하고, 서울특별시같이 번잡함이 아닌 평온한 지방 대도시의 실내 장식이 운치 있는 어느 바에 앉아 재즈를 들으며 헤내시를 마시는 맛. 능소화는 처음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시골집, 특히 대문 언저리 담벼락을 타고 올라가는 능소화가 일반적이지만 내가 능소화를 처음 본 곳은 뜻밖에도 이화여대 후문 언저리였다.
서울 입성 초기 신촌 봉원사 부근에서 자취를 하던 친구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던가? 나팔꽃도 아니고 등나무도 아닌 것이 덩굴은 왜 뻗었으며 꽃은 또 왜 저리 주홍으로 절절하던지 그 때 알아본 꽃 이름이 능소화였다.
凌霄花(능소화). 하늘을 업신여기는 꽃이라는 뜻이다. 도대체 얼마나 도도하기에 하늘을 업신여길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는 능소화의 마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인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인지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이다. 조선시대 어사 급제한 이가 금의환향할 때 머리에 꽂았다는 설도 있다. 중국에서 들여온 꽃이라 양반들만 키워 ‘양반꽃’이라는 비아냥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꽃과 잘 어울리는 사연은 궁녀 ‘소화’에 얽힌 이야기이다.
옛날 복숭아빛 어여쁜 소화라는 궁녀가 있었다. 어느 날 임금의 눈에 들어 하룻밤을 지내고 빈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임금은 소화의 처소에 들르지를 않았다. 착하고 순한 소화는 다른 빈들처럼 임금을 향해 추파를 던질 줄 몰랐던 것이다.
그저 하룻밤 모신 임금에 대한 사모의 일념으로 기다리기만 하던 소화…. 마침내 그녀는 상사병으로 죽게 된다. 그리고 죽으면 담벼락 밑에 묻혀 임금을 기다리겠다는 유언에 따라 어느 궁녀가 궁궐 깊은 곳 담장 밑에 그녀의 시신을 묻었다. 다음 해 여름부터 담 너머 멀리 임의 자취를 보겠다는 듯 덩굴을 뻗고, 임이 오는 소리를 듣겠다는 듯 크게 귀를 연 주홍의 꽃이 피어났다.
이렇듯 처연한 사연을 갖고 있는 능소화. 나 외엔 임의 모습을 보면 안 된다는 뜻인지. 능소화의 꽃가루는 낚싯바늘같이 생겨 눈에 들어가면 치명적이라고 한다. 또한 나 외에 임을 생각지도 말라는 심술인지 능소화의 향기를 오래 맡으면 뇌에 손상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얼마 전 능소화가 흐드러진 올림픽 도로를 달렸다. 올림픽도로 나이아가라 호텔 부근에서 김포공항으로 가는 길 오른편에 뜻밖에도 능소화들이 도열하여 주황과 주홍빛 고개를 내밀고 사열하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능소화에 대해 평소 남다른 애정을 가진 나로서는 어느 대중가요처럼 100점 만점에 100점이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는데 꽃 하나만 바꿔도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나는 이 길을 능소화길이라고 이름지었다.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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