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가에 내 놓은 빨래비누. 장맛비에 맞아 녹았다 굳었다를 반복한다. 그 끝자락에 무더운 여름이 자리 잡는다.
비 맞은 비누는 온 데 간 데 없고 흔적만 하얗게 남았다. 샘가에 하얗게 번진 태죽을 보며 이 여름은 어떠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지 상상하며 맞이했던 시간도 많이 지났다.
비누가 사라지며 남긴 흔적처럼 나는 이 여름에 내게 남은 혹은 나에게 흔적을 남긴 사람들을 살펴볼 시간도 없이 무위도식했다. 아무런 정리도 없이 이 여름을 보내기는 아까워 나에게 시원하게 흔적을 남긴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여름 길거리에서 가장 흔하고 정겨운 풍경은 무엇일까? 술 마시는 사람들이라면 조그마한 슈퍼 파라솔 밑에서 시원한 캔맥주 들이키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사연이야 어찌됐든 시원한 풍경임에는 틀림없다.
이 시원한 풍경을 맞이하면 S형의 얼굴이 떠오른다. S형에게는 남에게 감동을 주는 무엇인가 존재하는 것 같다. 작년 월드컵 기간에 S형으로부터 택배가 왔다. 캔맥주 세병, 구운 김, 땅콩이 배달되었다. 그날 저녁에 메시지가 떴다. “시원하게 한 잔 하면서 우리나라 경기 관람하게”라고… 이 여름에 캔맥주 같은 S형의 마음이 떠오른다. 이 여름 가기 전에 S형 시원한 맥주 한 잔 살게요.
편지 한 통 써 보았는지요? 편지 한 통 받아 보았는지요? 이 물음에 쉽게 답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현실이다.
내 자신부터 편지를 부쳐본 기억이 가물가물하기 때문이다. 방학이 되어도 한 두 통의 안부 편지를 학생들로부터 받아본 기억도 희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더위에 별 일 일어났다. 우리 반 수정이로부터 편지가 왔다. 두툼하다. 체육대회 때 달리기 하던 사진, 교실에서 찍은 사진 등 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찍힌 사진들이다. 여기에는 좀 더 편안하게 다가갈 수 없었던 사연과 더불어 ‘쿠폰’이 들어있었다. 수정이의 편지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심부름 쿠폰 3매, 안마 쿠폰 2매, 청소 쿠폰 5매. 머리가 갑자기 하얗게 된다. 베풀어야할 내가 베풂을 당한 듯한 기분이다. 무더위에 수정이는 나에게 삶이란 무엇인지 흔적을 남기고 있지 않은가?
해남이 좋아 삶의 터전을 잡은 지도 5년째이다. 집을 지으면서 혼자 짓는 것보다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 어울려 집을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가족 같은 P와 J가 이웃이 되었다.
담이 없어서 한 집 같은 생활을 하고 가끔씩 반상회 겸 공동으로 식사도하며 생활하고 있다. 봄이면 세 가족이 모여 사진도 찍으며 생활한지 벌써 5년이 되어간다. P와 J는 나에게 쿠폰은 발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정이가 보낸 쿠폰처럼 삶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이웃이다.
최근에 농사꾼도 아닌 내가 사연 많은 밭을 구입하게 되었고 콩을 심었다.
아침 저녁으로 짬짬이 풀을 뽑아보지만 진도는 나가지 않아 매일 그 자리인 것 같아 지쳐 있을 때 P는 가족을 이끌고 나와 콩밭의 풀을 매주었다. P는 쿠폰은 발행 안 했지만 나는 P의 쿠폰 한 장을 떼어 썼다. 쿠폰을 떼어 쓰며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무더위가 가고 있다. 여러 사람들에게서 수정이가 보내준 쿠폰처럼 베풂을 당하고 여름이 가고 있다. 나도 수정이처럼 남들에게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쿠폰’을 발행할 날을 준비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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