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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쪽, 땅끝 마을 해남. 나에겐 이어도만큼이나 너무도 아스라한 이름이었다. 해남에 산지도 벌써 6개월째 접어들었다. 동백꽃 피던 봄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매미소리가 귀청을 찌르는 한여름이 됐으니 벌써 두 계절이 지나고 있다.
부친이 오래전에 고향을 등지고 서울에 정착하다보니 나에겐 어려서부터 고향이란 말이 너무 낯설었다. 명절 때 친구들이 부모와 함께 때 빼고, 광내고, 선물 보따리를 잔뜩 싸들고 시골에 가는 모습이 어렸을 땐 무척 부러웠다. 아버지 고향이 이북이라 우리는 고향을 갈 수 없나보다 하고 막연히 추측했을 뿐, 왜 고향에 가지 않는지 감히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러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큰아버지가 우리 집 주소를 들고 찾아와 아버지와 눈물을 흘리며 상봉했을 때, 비로소 아버지 고향이 진도고, 어머니 고향이 강진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향은 그저 나에겐 사전에나 있고 유행가 가사에나 나오는 말일 뿐이다. 난 뼈 속까지 서울 촌놈이다. 경쟁에 익숙하고, 약삭빠르며, 남을 쉽게 믿지 못하고, 똑똑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속이 비어 허허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매사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이런 행동은 언제나 나에게 손해와 실패를 안겨주었지만 이번 해남 행 결정은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근 40년 만에 서울 생활을 접고 광주에 내려와 산지도 벌써 10년째다. 내려갈 때는 그래도 정정했는데 이젠 쇠약한 모습이 역력하다. 어머니는 약간 치매기가 생겼다. 내가 해남에 내려간다고 했더니, 6․25때 어머니의 외할머니댁인 해남으로 외삼촌과 피난 갔던 일을 자꾸 되풀이 하며 말한다. 나의 외할머니는 해남 윤씨고, 해남이 고향이었다. 그러고 보면 해남이 나에게 완전히 낯선 곳도 아니다.
해남이 대한민국 시문학 일번지 고장이라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조선시대엔 고산 윤선도, 미암 유희춘, 석천 임억령이 이곳 해남출신이었고, 서산대사와 초의선사도 이곳 해남과 인연이 깊다. 근대에 들어서는 이동주, 김남주, 고정희, 황지우 등 기라성 같은 시인들을 배출하였으니 아시아 대륙의 땅끝 기운이 범상치 않은 것은 분명하다.
해남에 있으면서 태어나 두 번째로 진도 친가를, 세 번째로 강진 외가를 소식도 없이 충동적으로 방문했다. 제주도를 세 번째로 가보았고, 여수 오동도, 고금도와 증도도 가보았다. 동백꽃 피고 지는 것도 보았고, 무색무취무미한 군자의 물맛도 보았으며, 태어나 처음으로 전복을 배불리 먹어보았고, 울돌목에서 뜰채로 건져 올린 숭어도 먹었으며, 간재미회, 홍삼, 뿔소라, 갑오징어와 장흥 생고기도 먹었다. 입이 떡 벌어지도록 차려져 나온 남도의 한정식에 마치 임금이나 된 기분도 느껴보았으니 이 모든 것이 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제 다음 계절이 기다려진다. 또 어떤 새로운 경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찬바람 소슬하니 불고, 마음이 허허로워 견딜 수 없어질 때 난 이곳 해남 출신 시인들의 시집을 한보따리 빌려서 기숙사 숙소 머리맡에 쌓아두고 손길, 눈길 가는대로 무작정 읽을 것이다. 그러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면 스르륵 잠이 들 것이고 아침에 일어나면 거울을 보며 면도를 하다 나의 달라진 모습에 기뻐할 것이다. 보다 순수해지고 맑아진 나의 영혼을 보며 흐뭇해 할 것이다. 남도의 풍경을 내 영혼 가득 채우기 위해 시집 한 권 들고 산과 바다 들판을 이리저리 헤매며 돌아다닐 것이다. 내 유전인자 속에 숨어있는 남도의 뜨거운 열정을 찾아내어 불쏘시개를 입으로 솔솔 불어 불꽃을 살려내듯 그 열정이 다시 타오르게 할 것이다.
내년 봄 또다시 동백꽃이 필 무렵에 나의 모습과 영혼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상상만 해도 즐겁다.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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