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그 이름만 불러도 들어도, 좋은 것만 봐도 눈물이 앞장을 서네요.
아버지께서 좋아하셨던 꼬막을 보면 목젖 밑에서 꿈틀대는 무엇인가가 울컥 올라옵니다.
판소리를 들으면 아버지의 정겨운 추임새가 생각이 납니다.
자식은 생전에 못해드린 것을 그리움으로 뒤늦게 깨달으며 비로소 어른이 되어가나 보네요.
아버지! 봄이라 하기엔 제법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요즘. 오늘은 연동마을의 공재 윤두서 자화상 앞에 섰습니다.
공재선생의 짧은 일생은 지인들의 우환으로 상복 벗을 날이 없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우수어린 표정에서 몇 해 전의 제 얼굴이 교차하네요.
갑작스런 어머니의 사고, 일 년 뒤의 오빠의 죽음, 그리고 4개월 뒤의 아버지와의 이별이 제 얼굴에 만 가지의 생각을 담게 하였어요.
영화에나 있을법한 16개월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만약에 말이다. 내가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거들랑 절대 아버질 오빠 집으로 보내지 마라. 누가 아버지 비유를 맞추겠니?” 생전에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어머니의 유지를 따르고자 아버지를 제가 보듬어 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 이제야 말이지만 저 많이 힘들었습니다. 교통사고 후유증과 뇌병변에 치매기까지 있으신 당신을 엄마가 하셨던 것처럼 모시지 못했으니까 더러는 갈등도 있었지요.
날마다 다니기가 어려워 살림을 합치자고 권면했을 때 “딸네 집에 얹혀사는 것은 사내가 할 짓이 못 된다”며 시골집으로 내왕하게 하셨던 아버지.
형제들 전화번호는 다 기억 못하면서 신기하게도 당신의 군번과 우리집 번호만 기억하신 바람에 오밤중에 울려대는 몇 번의 전화로 편히 쉬지도 못했습니다. “아버지. 나도 힘들어요. 밤에는 저도 쉬고 싶어요. 제발 우리 집 번호도 잊어주세요” 포악질을 해대는 딸의 고함소리에 “쯧쯧쯧” 혀를 차며 내려놓던 전화기의 울림이 동짓달의 매서운 한파처럼 아직도 제 가슴을 후빕니다.
가끔은 싸우면서도 천년이고 만년이고 제 곁에서 그렇게 살아가실 줄 알았습니다. 형제들에 대한 서운함을 아버지한테 풀었던 것 지금에야 용서를 구합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아버지의 외로움이 나의 고단함보다 더 컸었다는 것을…. 정작 떠나보내고 나서야 뒤늦게 알았습니다. 참 어리석지요.
중환자실에서 아버지의 세상소풍을 끝내던 날. 아버지의 볼을 타고 말없이 흘렀던 눈물과 살포시 내손을 잡으며 뚫어지게 눈 맞춤으로 무언의 당부를 하셨던 인연들과의 이별식.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숨이 턱턱 막혀옵니다.
내가 만약 오빠의 사망소식만 끝까지 숨겼더라면 우리들 곁에 더 오래 계셨겠죠? 먼 세상 가는 길이 태어나는 순서대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와의 이별보다 자식의 죽음 앞에서 목 놓아 우시던 아버지의 외로움과 사랑을 보았습니다.
아버지! 돌아오는 화요일이 아버지 86번째 생신이 되네요. 산소에 가서 언제나처럼 넓은 팔로 꼬옥 안아드리면서 세상얘기 들려 드릴게요.
아버지! 저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죄의 보따리를 내려놓고 나니 이제 조금은 가벼워진 듯 합니다. 아버지는 내 곁을 떠나셨지만 아직 못다 한 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내 맘에 새겨진 아버지의 공룡발자국을 밟으며 수성송을 닮은 해남인으로 살아가다가 저의 소풍이 끝나는 날 우리 다시 만나요. 아, 아버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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