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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민들 잦은 왜구 침입에 육지로 이주
영암 시종에 살다 삼산면으로 옮겨와
유태인들처럼 87년간 타향서 유랑생활
사람은 돌아가지만 땅은 진도 관할로 남아
삼산면 일부는 500여년 가까이 진도군에 포함된 땅이었다. 이곳은 조선 태조 때인 1409년부터 1906년까지 진도군에 포함돼 있었다.
해당마을은 삼산면 감당과 항리, 금산, 용두, 창리, 방축, 비산, 도토, 구미, 송정, 옹암, 목신, 덕정이다.
그렇다면 삼산면 일부가 왜 섬인 진도에 속한 땅이었을까. 이유는 진도의 슬픈 역사와 관련이 있다. 해남과 진도를 잇는 명량해협은 중국과 일본을 잇는 해로인데다 서남해안을 잇는 해로였기에 항상 전쟁의 중심에 있었다. 왕건과 견훤도 명량해협을 놓고 각축을 벌렸고 고려시대 삼별초가 강화를 출발해 도착한 곳도 명량해협을 낀 진도였다.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용장산성을 짓고 몽고에 항거하지만 고려정부와 몽고군의 연합군에 패배하고 만다. 삼별초의 근거지가 된 용장산성은 아예 흔적도 없이 초토화 돼버렸고 진도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몽고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다. 이들은 27년 만에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와 몽고군의 군마를 사육하는 목부로 비참한 생활을 한다. 몽고군이 물러나자 이젠 왜구의 침략이 시작됐다.
왜구의 침략은 조선시대 초까지 이어지는데 고려와 조선은 왜구의 침입에 맞서기 보단 섬지역과 해안가 50리를 아예 비우는 이른바 공도정책이라는 매우 소극적인 방법을 택했다. 진도사람들은 이젠 강제로 육지로 이주해야 했다. 몽고에서 돌아와 다시 힘겹게 살아가는 진도 사람들은 다시 유태민족처럼 육지를 떠돌며 87년 간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
강제이주 정책으로 진도 사람들이 처음 도착한 곳이 영암군 시종면 월악리와 태간리 지역이었다. 진도 사람들은 이곳에서 59여년의 타향살이를 한다. 이때가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이었다.
진도로 봤을 때 영암은 고향과 너무 떨어져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조선 태종 9년인 1409년 2월에 진도 사람들을 다시 해남 삼산면 서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리고 영암에 있던 진도현을 삼산면으로 옮기고 해남과 진도를 합해 해진현이라 불렀다.
진도와 합해지기 전 해남현의 치소는 현산면 고현에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군청사가 고현에 있었던 것이다. 해남과 진도를 하나의 현으로 묶은 조선정부는 현산면 고현에 있던 치소를 삼산면 계동으로 옮기고 진도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킨 삼산면 지역을 삼촌면이라 명명했다. 진도사람들이 정착했던 삼촌면의 면소재지는 현 삼산면 송정마을이다.
구전에 의하면 고려 충정왕(1348-1351)때 충정왕 삼촌이 진도로 유배를 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구의 창궐로 진도현은 이미 영암군 시종면으로 옮겨간 후였다. 이에 충정왕은 삼촌을 현 삼산면 송정마을에 머물게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송정마을은 삼촌면 삼촌리가 되었고 이후 진도사람들이 영암에서 이주해오자 삼촌리가 삼촌면의 면소재지가 됐다는 것이다.
87년을 타향에서 살았던 진도사람들은 조선 세종 때 이르러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세종은 왜구의 침략에 적극 대처했다.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을 추진하는 강경책을 쓰며 국방을 강화했다. 영암으로 떠난 뒤 59년 만에 해남으로, 다시 28년 뒤인 1437년에야 진도사람들은 87년의 기나긴 유랑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대부분 진도사람들은 다시 진도로 돌아갔으나 일부는 30여 년간 살았던 해남에서 눌러 앉았다. 이에 정부는 진도사람들의 자손이 살던 해남 삼촌면을 진도군에 속한 땅으로 만들어 줬다. 500여년 동안 진도의 월경지가 된 삼촌면은 각종 조세를 진도에 납부했다. 삼촌면과 진도를 잇는 물길은 어성천이었고 어성천 하구에 있던 삼촌포는 관문 역할을 했다.
『해동여지도』에도 삼산면 일대는 진도 삼촌면(珍島 三寸面)으로 표기돼 있다. 이는 당시 삼산면이 진도현의 월경지였기 때문이다. 1906년 9월24일 진도군에 속해있던 삼촌면은 해남군으로, 진도 사람들이 57년간 살았던 영암의 명산면(현 시종면)을 영암군으로 넘겨주는 행정개편이 단행됐다.
삼촌면이 해남군에 귀속되면서 삼촌면과 녹산면을 통합해 삼산면이 됐다.
한편 진도 사람들이 삼산면 일부에서 거주할 당시 고향땅을 밞을 기회는 있었다. 이때도 강제이주였다. 태종임금은 1414년 1월 제주도 안무사 윤임에게 명해 제주 말 1800필을 진도로 옮기게 했다. 15차례에 걸친 말 운송이 끝나자 같은 해 3월 해진군수 이각에게 명해 진도 사람들을 데리고 진도(현 고군면 외이리)에 들어가 목장 일을 하게했다. 그러나 수초가 부족해 적합지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져 동년 11월 목장은 폐쇄되고 진도 사람들은 다시 삼촌면으로 돌아온다.
진도사람들은 이후 그토록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다시 짓밟힌다. 상처가 아물 즈음엔 동학 갑오농민전쟁의 최후 항전지가 되면서 섬이 초토화 된다. 섬이었던 관계로 특히 명량해협이라는 중요 해로에 있었던 이유로 진도는 항상 아픈 역사의 중심에 있었고 그로인해 숱하게 강제 이주를 당한다. 그 아픈 역사로 인해 한 때 삼산면 일부가 진도 땅이 되었던 것이다.
박영자 기자/
*아래 사진 설명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진도사람들은 유태민족처럼 육지를 떠돌며 87년 간 유랑생활을 했다. 진도사람들이 살았던 삼산면 일부는 삼촌면으로 불리웠고 삼촌면의 면소재지는 삼산 송정리였다.
진도 땅이었던 삼촌면을 500년 이상 지켜온 삼산면 송정리 뒷산 소나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