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수로인 울돌목 전투는 피아 모두 피했다
실지 전투는 우수영 앞바다서 이뤄졌다



명량해전, 조선을 구하고 명나라까지 구한 전쟁, 7년의 임진왜란을 종식시킨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과연 처음부터 물살을 이용했을까. 또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자진(一字陣)이라는 진법을 활용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수군도 울돌목 물살을 나름대로 연구를 했을 것이고 또 울돌목 지형자체가 일자진을 형성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자진은 목을 빈틈없이 틀어막을 수 있는 조건에서 효과적인 진형이다. 따라서 견내량과 같이 협수로인 울돌목에서 이순신이 일자진을 형성했을 것이란 추정은 그동안 일반 설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순신이 일자진을 형성해 울돌목의 목을 지키며 조선의 우수한 장거리 포를 발사하고 있는 곳에 과연 일본 수군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 군사 전문가들은 울돌목의 협수로엔 5대 이상의 배가 나란히 들어올 수 없다고 본다. 그런데 난중일기에는 왜선 31척이 불에 타고 침몰했다고 적고 있다. 일자진을 형성해 적을 맞았다면 일시에 적의 배가 침몰할 수 없으며 앞선 배가 침몰되고 있는 곳에 뒤의 왜선이 계속해서 밀려올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울돌목 협수로는 센 물살 때문에 일자진이라는 진형을 형성하기 어렵고 판옥선과 같이 큰 배는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은 곳에서 싸우기 힘들다는 점도 일자진을 부정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실지 이순신은 협수로인 견내량에서도 싸우지 않았다. 견내량에 있는 적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학익진으로 섬멸했다. 이유는 견내량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을 뿐만 아니라 수로 또한 좁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이 활동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울돌목은 병법에서 보면 사지(死地)이다. 병법을 아는 자라면 사지를 뒤에 두고 싸우지 않는다. 사지는 전쟁에 불리했을 때 퇴각하는 길마저 막아버린다. 그것은 전멸을 의미한다.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은 진도 벽파진에 주둔하고 있었다. 벽파진은 사지인 울돌목을 뒤에 두고 있다. 따라서 이순신은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9월 15일 전라우수영으로 진을 옮긴다. 우수영 마을 선착장이 있는 양도 뒤편이다.
이순신이 우수영으로 옮긴 하루 전날인 9월 14일은 일본 수군이 송지 어란에 도착한 날이다. 전쟁이 임박해졌음을 안 이순신은 다음날 전라우수영으로 진영을 옮김으로서 사지인 울돌목을 앞에 두게 된다. 그러나 일본수군이 울돌목의 협수로를 통과해 우수영 앞바다로 나오게 되면 왜군은 사지를 뒤에 두고 전쟁을 치르게 된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은 항상 승리를 거뒀다. 이유는 유리한 지형을 만든 후에 전쟁에 임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순신은 병법에 탁월했고 치밀했다. 유리한 지형을 확보한 후 이순신이 구상한 전략과 진법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도 13척의 배로 수백의 일본수군과 맞설 병법이여야 한다.
군사전략가 노병천씨는 그의 저서 ‘이순신을 알면 일본을 이긴다’에서 이순신은 어떠한 전법도 구사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유는 이순신이 기습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명량해전 당일인 9월16일자 난중일기를 예로 들고 있다.
아침에 망군(望軍)이 나와서 보고하기를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우리 배를 향해 옵니다라고 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척이 우리의 여러 배들을 에워쌌다.

이 내용을 근거로 울돌목의 좁은 해로에선 왜선이 조선수군의 배를 에워쌀 수 없다는 것이다. 왜선이 울돌목 협수로를 통과해 우수영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기습이 있을 때까지 이순신은 이를 몰랐을까. 노병천씨는 망군이 일본왜선을 최초 발견한 시간과 장소 그리고 이순신에게 보고하기 위해 왔던 시간 등을 조목조목 들며 망군이 도착한 시간과 일본왜선이 도착한 시간을 같이 보고 있다. 그만큼 일본 수군의 행동이 신속했다는 것이다.
또 기습을 당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장수들이 겁에 질려 본진에서 800미터 내지 400미터까지 물러나 있었다는 점도 이순신이 진을 미리 형성해 일본군을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병천씨는 이순신의 위대함을 이 대목에서 들고 있다. 필사즉생(必死則生),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우리 배에게는 맞서 싸우지 못할 것이다. 일체 마음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선을 쏘아라.” 그리고 이순신은 맨 앞에서 싸웠다는 것이다.
목숨을 건 싸움. 그리고 역전의 기회가 왔다. 일본 제1선두제대의 대장인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일본 시코쿠 지방의 다이묘, 이순신은 즉각 구루시마의 목을 베게하고 돛대 맨 꼭대기에 걸었다.
대장의 죽음, 일본수군의 진열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류는 일본 측에 불리한 썰물로 바뀌었다. 조류를 이용하는 것은 해전에서 기본, 이순신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일제히 북을 울리고 장거리 포를 발사하며 적들을 울돌목의 사지로 밀어 넣은 것이다. 사지를 뒤에 두고 싸움을 걸었던 일본수군은 좁은 해협에서 도망가는 전선과 올라오는 전선들이 서로 엉켜 자중지란을 일으켰다. 왜선 31척 완파, 90여척은 치명적 파손, 온전한 배는 10여척에 불과했다. 완전한 승리였다.
일본수군이 어란에서 출발해 울돌목에 이르렀을 때는 그들의 입장에서 순류인 밀물이었다. 순류를 타고 왔다지만 일본수군의 입장에서도 협수로인 울돌목에서의 전쟁은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울돌목을 넘어 우수영 앞바다에서의 전투, 많은 배를 소유한 일본의 입장에선 협수로가 아닌 넓은 곳에서의 전투를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의 뛰어난 병법과 용맹함도 알고 있었고 울돌목 사지를 뒤에 두고 전쟁을 치른다는 점도 알고 있었지만 조선수군은 13척의 배, 쉽게 이길 것이란 계산도 깔려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일본은 대패했다. 이순신은 하늘이 도운 승리였다고 했다. 그만큼 명량해전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전쟁이었다. 그러다보니 명량대첩과 관련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물살의 도움으로 승리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어떤 전법을 활용했는지는 더 많은 연구가 이뤄질 것이다.
그러나 명량해전에서 일본이 진 것은 이순신의 필사즉생(必死則生)의 정신에 진 것이며 이순신의 사지를 이용한 병법에 졌다는 점에선 이견이 없을 듯 하다.          
박영자 기자/



*아래 사진설명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일자진이라는 진법을 썼을까. 명량대첩과 관련된 대부분 해전도엔 일자진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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