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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에서 발굴된 고대유물 대부분은 가야와 신라, 중국, 일본 관련 유물이다. 해남은 마한시대 이후 백제에 복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지 나오는 유물들은 백제계 유물이 거의 없다.
발굴된 토기 대부분은 가야계통이 주를 이루며 돈과 점을 쳤던 복골 등은 중국계통이다. 또 해남에서 발굴된 고대 무덤양식은 공교롭게도 일본 고대 무덤양식을 띠고 있다.
한마디로 해남 고대유물은 국제적이다. 신라 가야를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 유물이 다량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유물의 특성으로 보아 해남은 국제해상 무역의 중간 기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장거리 해상활동을 해야 했던 고대인들은 중간 기착지인 해남에 잠시 머물면서 돈(화천)과 자신들의 무역품이었던 토기로 식량을 구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개무역의 이득을 취한 이들은 중국, 가야 등의 선진문물을 향유했고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로 일본고대 문화도 받아들었다. 그리고 거대한 무덤과 유물을 후세에 남긴다.
우리나라 철기시대 대표 유적지인 송지 군곡리 패총은 2만여평 중 200여 평 정도만 발굴됐다. 이곳에서 발견된 화천은 기원후 8~40년에 중국에서 생산된 청동화이다.
화천은 고대 해로상인 경남 사천·김해·제주 등과 일본의 대마도, 큐슈의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군곡 패총지에서는 점치는 도구인 복골(점뼈)도 발견됐다. 길흉을 점치는 원시신앙의 흔적이며 중국전통 의례라 할 수 있다.
옥천 만의총 1호분에선 신라, 일본, 가야양식을 따르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고, 무덤 양식도 삼국의 기존 양식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발굴 유물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은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토우(土偶.흙으로 만든 인물ㆍ동물상)가 장식된 서수형토기(瑞獸形土器.술병)이다.
서수형토기와 토우는 신라 경주에서만 만들어졌다는 것이 그간 학계의 중론이었다. 그런데 서수형토기는 백제가 다스리던 해남지역에서, 그것도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토우와 서수형토기가 결합된 독특한 형태로 출토됐다.
북일 용운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두귀달린 편병은 말 옆에 묶어 사용했던 것이다.
마한인은 말을 타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하지만 현산 월송 고분군에서 마제류가 대거 나왔다.
또 북일 외도 고분에서도 철갑옷 파편이 나와 말과 관련된 유물이 해남에서도 발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과 해남과의 긴밀한 관계는 무덤양식에서 볼 수 있다.  
북일 방산의 전방후원형분, 원일마을의 방형과 원형 고분, 신방리의 즙석분, 현산 월송리 조산고분 등은 일본 고대무덤 양식이 짙어 일본과의 교류를 알 수 있는 곳이다.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대표적인 고대 무덤양식으로 이 같은 무덤양식은 북일 신방리 장고분을 비롯해 삼산 용두리고분, 그리고 나주 시종 등 영산강 일대에서 많이 발굴됐다. 이러한 고분군은 5∼6세기 고대 한·일교류를 살피는 중요 유적이다.
이시기 활동한 해상세력들은 해남 곳곳에 산성을 축성한다.
현산 백방산성과 고다산성, 읍호리성, 일평성지, 읍 남송리 옥녀봉 토성, 북일 거칠마 산성 등을 축조해 침입하는 적을 방어했다.
현재 해남에는 다양한 고대유물이 발굴되고 있지만 아직 발굴되지 않는 유적도 상당하다. 이러한 유물이 발굴되면 해남 고대사회의 성격은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풀릴 가능성도 있다.
현재 해남에서 발굴된 무덤양식 대부분이 일본 색채가 짙다는 게 학계의 의견이다.



일본과 교류


일본의 대표적인 고대 무덤양식은 전방후원분인데 이와 같은 무덤양식이 북일 신방리와 삼산 용두리에서 발견됐다. 이러한 무덤양식은 영암 시종 등 영산강 일대에서만 발굴된다.
북일 신방리에서 발견된 즙석분(자갈돌로 고분군 표면을 덮음)과 원형분, 방형분, 현산 월송리 조산고분도 일본양식이 짙다.  
현산 월송 조산고분 및 옥천 만의총의 청동거울은 일본에서 발견된 청동거울과 유사하다. 월송 조산고분에서 나온 조개껍질은 일본 오키나와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북일 용운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두귀달린 편병은 말 옆에 매달아 사용했던 물병이다. 이러한 모양의 토기는 일본에서도 다량 발굴되고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선 마한인은 말을 타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러나 현산 월송 고분군에서 마제류가 대거 나왔고 북일 외도 고분에서도 철갑옷 파편이 나와 말과 관련된 유물이 해남에서도 발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한 토착세력은 말을 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유적들은 일본과의 교류의 흔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사진=광주국립박물관과 목포대학교에 소장된 말 관련 도구와 청동거울 및 조개껍질,>



중국과 교류


송지 군곡리 패총에서 발견된 화천은 기원후 8~40년에 중국에서 생산된 청동화이다.
화천은 고대 해로상인 경남 사천·김해·제주 등과 일본의 대마도, 큐슈의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점치는 도구인 복골(점뼈)은 길흉을 점치는 원시신앙의 흔적이며 중국전통 의례라 할 수 있다.
송지 군곡리에서 발굴된 가마터는 기원후 3세기 조성된 것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최초 가마터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광주박물관에 소장된 복골과 화천>



가야와 교류


해남 전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백제가 아닌 대부분이 가야계통의 토기이다.
또 화산 부길리 옹관과 삼산 옹암 옹관에서 출토된 철도 가야(변한)계통이다.
가야는 질 좋은 철로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 땅에 세웠던 낙랑과 대방 및 일본과 활발한 해상교역 활동을 전개하며 부를 축적했는데 이들 해상세력은 해남 백포만을 경유한 후 서해를 거쳐 낙랑과 대방으로 진입했고 낙랑과 대방도 가야와 일본으로 가기 위해 백포만을 경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광주국립박물관과 목포박물관에 소장된 가야토기와 철>



신라와 교류


옥천 만의총 1호분에선 신라, 일본, 가야양식을 따르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토우(흙으로 만든 인물ㆍ동물상)가 장식된 서수형토기(瑞獸形土器.술병)가 출토됐다.
신라 경주에서만 만들어졌다는 것이 그간 학계의 중론이었는데 백제가 다스리던 해남지역에서, 그것도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토우와 서수형토기가 결합된 독특한 형태로 출토됐다.
<사진=광주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서수형토기>



주거터


현산면 분토리와 영산강 이남에서 처음으로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조성된 주거지가 발견됐다.
분토리 유적지에선 청동기시대 송국리형 주거지 13기를 비롯해 삼국시대 주거지 19기가 발굴돼 취락 변천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삼산 신금마을에서는 3∼5세기에 해당되는 주거지가 다량 확인됐다.
이곳 주거지는 화재로 마을이 소멸한 것으로 추정돼 당시 일본과의 전쟁의 흔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박영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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