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와 연계된 포구는 고달픔의 상징
황원목장은 말 관리보단 민폐만 끼치고




해남에 부임한 현감들은 마산면에 있는 권문세족에게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드려야 했기에 현감 생활이 매우 고달팠다는 이야기는 아침재 전설로 남아있다.
그러나 실지 해남현감 생활이 힘들었던 것은 해남 인근에 정부 관할 기관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관할 기관이 많다는 것은 편리한 점도 있었겠지만 그 벼슬아치들을 모셔야 하는 번거로움과 그로인한 민폐가 심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북평면 남창에는 ‘해월루’라고 하는 허름한 조선시대 건물이 남아있다. 해월루는 남창의 달량진(당시에는 영암 땅)을 통해 제주도를 왕래했던 제주도 고을 수령과 중앙에서 파견된 사신이나 벼슬아치 일행이 순풍을 기다렸던 곳이다. 그 일행은 선단을 이루고 떠났으므로 수십 명에 달했다. 게다가 순풍을 기다리는 것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쩔 때는 몇 개월이 걸리기도 해 많은 비용이 수반됐다. 그 기나긴 나날, 이들을 대접해야 하는 일은 인근 고을의 수령과 주민들의 몫이었다.
해월루에서 쉬는 관리들의 대접과 여비는 영암군수와 해남, 강진 현감이 일 년씩 번갈아 가며 맡았으나 항상 달량(남창)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해월루 인근 남창 주민들의 민폐가 제일 컸다. 그 피해가 어찌나 컸던지 임금에게까지 보고가 됐다. 그 결과 정조 18년(1794)에 제주도를 왕래하는 벼슬아치들에게 달량과 함께 강진 남당포, 해남 관두포를 한 해씩 차례로 이용하게 했고, 그 접대도 해당 고을에서 직접 맡도록 했다. 이러한 포구 주민들의 고충은  정조 때 호남 암행어사 정만석이 올린 글에서도 나타난다.
“소안도(所安島: 완도)는 제주를 왕래할 때에 바람을 기다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봉명사신(奉命使臣)과 탐라 수령, 그 밖의 차원(差員: 심부름하는 벼슬아치)들이 왕래할 때 본섬에서 수십 일 혹은 한 달 가량을 머물게 됩니다. 따라서 음식을 대접해야 할 일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그리고 제주의 진상품을 가져온 감색(監色: 감독관)이나 선격(船格 : 배를 모는 것을 도와주는 일꾼들) 등의 대접 비용도 끝이 없습니다만 이 모두를 섬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이는 백성들의 삶을 보존하지 못하게 만드는 병폐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제주도와 연계된 포구는 주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지역 수령에게도 결코 달갑지 않는 존재였다.
또 해남의 주민과 현감은 제주 말 때문에도 고충을 겪었다.  
제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말이 길러졌고, 조선에 들어와 말은 교통·군사·농경, 외교상의 교역품 등으로 더욱 요긴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마정(馬政)은 국가의 중요한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제주와 가장 가까운 북평 이진을 비롯해 서남해안 곳곳에는 제주 말이 상륙하는 포구가 존재했다.
북평 이진으로 상륙한 말은 북평과 북일을 잇는 쇄노재를 넘어 영암으로 향했다. 말이 이동하는 곳에 위치한 고을 수령과 마을 주민들은 말이 먹어야할 건초와 물을 대야 했고 말이 죽거나 다쳤을 때의 책임도 져야했다.
말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조선 초에 큰 변화가 모색됐는데 다름 아닌 제주지역 외에서도 양마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한 일이다. 그 결과 해남에도 화원반도에 목장이 들어선다. 이른바 황원목장이다.
조선 초와는 달리 조선 후기 들어 황원목장은 진도 지산면 관마리의 진도감목관이 관리했다. 그런데 황원목장은 진도와 7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보니 그 피해가 더욱 컸던 모양이다.
정조 때 호남 암행어사 정만석은 “황원목장은 진도와 멀리 떨어져 있어 관아에서 검찰(檢察)할 수 없고 한 무리의 병방(兵房)에게 위임해 마음대로 백성들을 수탈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어 민폐가 점점 심해지고 말 관리는 점점 소홀해지고 있다”고 아뢰고 있다.
황원목장과 밀집한 관련이 있는 진도목장의 초설부터 살펴보자. 진도목장은 1413년(태종 13) 10월부터 추진돼 이듬해 1월 제주도에서 사육하던 말이 진도 고읍(古邑: 고군면 외이리)으로 옮겨와 방목된다. 그런데 1414년(태종 14) 9월에 전라도관찰사가 “진도 목장은 목초지로 부적당하다”며 진도 목장의 폐지를 건의하자 1년 만에 혁파되고 만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1440년 전라수영이 우수영에 설치되고 서남해가 왜구로부터 안정되자, 1445년(세종 27)에 하삼도 순찰사 김종서가 진도 등에 다시 목장을 설치할 것을 건의한다. 그 결과 1446년(세종 28)에 서남해 여러 곳에 목장이 신설되는데 진도에 3곳, 해남엔 화원, 문내, 황산에 설치되고 제주에서 데려온 1500여 필이 방목된다.
중앙 정부는 목장관리의 책임을 목장 인근에 있는 수령이나 수군진 만호들에게 부과했다. 이로인해 수령들은 말들을 해적이나 호랑이들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고, 번식해야 하는 골치 아픈 문제를 담당해야 했다.
황원목장의 경우 처음에는 영암군수가 관할했다. 1448년(세종 30)이전까지 황원지역은 영암군에 소속된 땅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황원목장이 영암에 소속돼 있다 보니 거리가 멀고 매년 봄, 가을 점마(點馬)하러 오는 관리들의 대접 때문에 폐단이 있으므로 가까운 해남의 땅으로 이관하였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황원목장의 관리도 해남현감이 관리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가 언젠가 진도 감목관의 관할로 변경된다. 이는 김정호가 1861년 편찬한『대동지지』에 “(진도)감목관을 화원목장으로 옮기고 진도를 속장으로 한다”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에 의하면, 진도의 지산면에 설치됐던 진도감목관(종6품)이 황원목장을 속장으로 관할했으나 폐단이 있어 감목관 관아를 해남의 화원면으로 이거 하고 진도의 목장까지 관할하게 한 것이다.
한편, 해남에는 전라우수영도 존재했다. 우수영 관할은 7관(고을: 해남, 진도, 영암, 나주, 무안, 함평, 영광)과 17포(수군진: 전북 군산진~ 장흥 회령진)였다. 전라좌수영의 5관 5포에 비하면 위세가 대단히 커서 우수영 수사는 변방의 절대 권력자였다.
해남을 비롯한 수령과 만호(정4품)들은 전라우수사의 지휘체계에 있었다. 해상방어는 물론 합동해상전투훈련, 군역(국방), 부역(노동), 조운, 제주도 파견 관리의 호송, 전함(배)의 건조 등에서 우수사의 명령에 따라야 했고 필요한 공물도 조달해야 했다. 완도에서는 숯을, 진도에서는 닻줄을 만드는데 필요한 칡을 해다 받쳤는데, 암행어사 정만석은 그 폐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진도 가사도(加士島)는 우수영에 푸른 칡을 돈으로 대신 납부하는데 1냥 6전에 수수료 명목으로 보리 3두를 거둔다”고 했다.
전라우수사는 정3품 당상관이었던 반면 해남현감은 종6품에 불과했다. 더욱이 해남현감은 문관이 아닌 무관출신이 대부분이었으니 직속상관을 상시 곁에 모시고 사는 셈이었다. 전라우수영을 현지에 두고 있는 해남현감이 이러하니 관할지역 주민들이 당한 각종 민폐의 고달픔도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는다.                
박영자 기자/


** 아래 사진 설명


화원면의 나이든 어른들은 지금도 면소재지 일대를 목장이라 부른다. 목장이 있었던 노인복지관 뜰에는 감목관들의 비석이 서 있다.<사진제공 변남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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